임사홍, 조선을 피로 물들인 간신배
조선 역사상 가장 흉악한 간신들의 계보에서 임사홍(1445~1506)은 단연 정점에 있다. 좌찬성 임원준의 아들이자 효령대군의 손녀와 혼인한 그는, 이러한 고귀한 신분을 권력 악용의 배경으로 삼았다. 1465년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 승지, 도승지, 이조판서로 승진하는 과정은 후일 자행할 대규모 정치 테러의 준비 단계에 불과했다.
임사홍의 폭정은 연산군대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아들 임숭재가 연산군의 부마가 되자 이를 발판으로 더욱 강대한 권력을 쌓았다. 숭록대부 지중추부사라는 고위직과 풍성군이라는 작위는 그의 손아귀에서 조선 조정을 휘어잡는 무기가 되었다.
1504년, 임사홍은 자신의 가장 큰 악행인 갑자사화를 주도한다.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과 손을 잡고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되어 사사된 내막을 폭로했다. 이는 단순한 폭로가 아닌,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치밀한 정치적 모략이었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무고한 신하들이 목숨을 잃었고, 조선 조정은 피바다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숙청의 칼날은 산 자들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의 가문까지 멸족시키는 무자비한 보복을 자행했다. 조정은 공포에 질렸고, 어느 누구도 그의 권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
임사홍의 최후는 그가 저지른 악행에 걸맞은 것이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그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고, 아들 임희재도 함께 처형되었다. 그가 그토록 쌓아올린 권세와 부는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임사홍의 악행은 한 시대의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자신의 사욕을 위해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렸고, 무고한 이들의 피를 흘리게 했다. 조선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권력 남용과 정치적 폭력의 대명사로, 후세에 경계해야 할 가장 악랄한 간신의 표상으로 남게 되었다.
"권력은 칼과 같아서, 올바른 자의 손에 들어가면 정의가 되고, 간신의 손에 들어가면 도끼가 된다."
- 조선 시대 사관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