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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터 민수의 하루

by 조우성 변호사


<어느 인생이야기> 로스터 민수의 하루


2024년 11월 9일 토요일, 쌀쌀한 늦가을 아침


새벽 5시 30분이었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 골목 끝, 내가 세운 작은 로스터리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파고들었고, 손끝이 시려왔다. 로스터기를 켜자 낮은 웅웅 소리가 고요를 찢었다. 문득 10년 전 아버지가 떠올랐다. “커피로 먹고살겠다고?” 툴툴거리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박혀 있다. 그때의 나는, 이 새벽에 여기 서 있는 33살 민수를 상상이나 했을까?


아침 6시였다.


콜롬비아산 생두를 로스터기에 쏟아부었다. 곧 팝콘 터지는 듯한 소리가 작업실을 채웠다. ‘퍼스트 크랙’이 시작되는 순간, 숨을 죽이고 눈을 뗄 수 없었다. 생두가 열에 터지는 이 찰나를 놓치면 맛이 망가진다. 연기가 아침 햇살에 스며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로스터기 손잡이를 쥔 손바닥에 땀이 차 미끄러질 듯했다. 갓 볶인 커피의 깊은 향이 코끝을 찔렀다. 2024년, 그러니까 올해 한국의 1인당 커피 소비량이 400잔이라던가. 이 작은 생두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채운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오후 1시가 지나면서였다.


단골 카페 사장 지연 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민수 씨, 지난번 블렌드에서 산미가 좀 강했는데, 이번엔 부드럽게 부탁할게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생두를 10초 더 볶아서 단맛을 끌어내볼게요. 근데 요즘 콜롬비아산 품질이 들쑥날쑥해서 걱정이에요.” 지연 씨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럼 다른 산지로 바꿀 건가요?” “글쎄요, 아직은 이걸로 버텨보려고요.” 대답하며 로스터기를 다시 돌렸다. 그녀의 미소가 작업실을 잠시 따뜻하게 했다. 커피 로스팅으로 연수입 5천만 원을 번다지만, 처음 1억 넘는 돈을 쏟아부은 걸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철렁한다.


오후 3시, 일이 꼬였다.


납품할 생두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곰팡이 핀 듯한, 날카로운 냄새였다. 품질 불량이었다. 숨이 막혔다. “이걸 지연 씨 카페에 보냈다가 평판이 망가지면 어쩌지?” 땀이 차가운 이마를 타고 흘렀다. 손이 떨리며 거울 속 얼굴이 낯설었다. 꿈꿨던 로스터의 모습이 아니라, 실패자의 얼굴이었다. 문득 5년 전이 떠올랐다. 처음 로스터기를 돌리던 날, 생두를 태워 작업실이 연기로 뒤덮였었다. 그때도 손이 떨렸고, “포기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 연기 속에서 나는 다시 일어섰다. 예비 생두를 꺼내 급히 로스터기를 돌렸다. 뜨거운 열기가 손끝을 찔렀고, 고온 작업으로 로스터의 20%가 화상을 입는다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저녁 7시가 가까워졌다.


쿨링 트레이에 볶은 커피를 쏟아부었다. 사각거리며 식는 소리가 작은 박수처럼 들렸다. 깊은 향이 작업실을 감쌌다. 시음용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산미가 혀끝을 찌르고, 단맛이 목구멍을 부드럽게 타고 내려갔다. 지연 씨에게 납품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의 불안도 나를 키우는 열기였다.


밤 9시였다.


문을 잠갔다. 불 꺼진 작업실 밖으로 차가운 밤공기가 스며들었다. 커피 로스팅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불꽃과 열기 속에서 나를 던져야 한다. 처음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쓴 선택을 후회했었다. 하지만 이제 안다. 실패를 태우고, 두려움을 볶으며,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다. 이 작은 로스터리에서 나오는 향은 누군가의 하루를 지탱하는 손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를 다시 세우는 힘이었다. 어쩌면 이 직업은 커피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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