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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간호사 박지은의 하루

by 조우성 변호사


<어느 인생이야기> 산부인과 간호사 박지은의 하루


2024년 10월 19일 토요일, 서늘한 가을 바람과 안개가 뒤섞인 새벽


새벽 3시 30분, 강원도 원주의 중소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차가운 핸들이 손바닥에 얼어붙은 듯했고, 안개에 젖은 공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며 폐를 채웠다. 입안엔 집에서 급히 삼킨 김밥의 짠맛이 남아 있었다. 남편이 "오늘 좀 일찍 들어와"라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분만실에 들어서자 소독약 냄새와 낡은 히터의 타는 먼지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오래된 모니터가 깜빡이며 삐삐 소리를 뱉어냈다. 헤드랜턴 불빛 아래 산모의 긴장한 얼굴이 보였다. ‘오늘은 두 명뿐이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을 씻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운 물과 비누 거품의 미끄러운 감각이 나를 깨웠다.


8년 전, 처음 이 분만실에 들어섰던 날이 떠오른다. 손이 떨려 혈압계도 제대로 못 썼고, 산모의 비명에 가슴이 철렁했다. "지은아, 생명을 다루는 손은 떨면 안 돼." 간호사였던 어머니의 말이 나를 이 길로 이끌었다. 원주에서 유일한 분만실이던 이곳에서 나도 태어났다. 이제 내가 그 손이 됐다. 하지만 지방 병원의 낡은 장비와 부족한 인력은 매일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위기의 시작


오전 5시, 첫 산모의 ‘진통 간격’이 3분으로 줄었다. 나는 모니터를 보며 ‘태아 심박수(FHR)’를 확인했다. 2023년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지방 중소 병원의 간호사 1인당 환자는 20명에 달한다. 오늘은 동료가 병가를 내는 바람에 나 혼자 두 산모를 케어해야 했다.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와 산모의 숨소리가 뒤섞여 머리를 어지럽혔다.


갑자기 두 번째 산모의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FHR’가 160에서 90으로 급격히 떨어졌다.


"의사님, ‘양수색전증(AFE, 양수가 혈관으로 유입되는 응급 상황)’ 의심돼요!" 목소리가 떨렸다. 산모가 숨을 헐떡이며 창백해졌다. 2023년 자료에 따르면, AFE 사망률은 20~40%. 지방 병원은 응급 장비가 부족해 더 위험하다. 나는 산소마스크를 씌우며 손끝의 떨림을 삼켰다. 손에 닿는 산모의 차가운 피부, 코를 찌르는 산소의 날카로운 냄새가 현실을 더 긴박하게 만들었다.


"의사 선생님, ‘산후출혈(PPH, 분만 후 과다 출혈)’ 대비해 수혈팩 준비할까요?" 내가 다급히 물었다.


"빨리! ‘자궁경부열창(Cervical Laceration, 자궁경부 찢어짐)’도 확인해!" 의사가 외쳤다.


밖에서 남편이 문을 두드렸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아내 괜찮아요?"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잠시만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손에 쥔 수혈팩이 미끄러질 뻔했다.


산모의 혈압이 떨어지며 ‘쇼크 쇼크(Shock Shock)’ 경고가 울렸다. 나는 주사기를 들고 ‘에피네프린(Epinephrine, 심박수 회복 약물)’을 준비했다. 그 순간, 아기의 머리가 보였다. "자, 힘줘요!" 의사의 외침과 산모의 마지막 힘이 합쳐졌다. 마침내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분만실의 혼란을 뚫고 내 가슴을 울렸다.


감정의 폭풍


오전 10시, 분만이 끝난 뒤 산모의 남편이 다가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간호사가 제대로 했어요?"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숨이 막혔다.


"의사 선생님과 함께 최선을 다했어요. 산모와 아기 모두 무사해요." 침착하게 답했지만, 가슴은 무거웠다. 2023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간호사의 68%가 감정 소진을 겪는다. 나도 그중 하나다. 산모의 고통을 위로하고, 가족의 불안을 달래는 건 내 일상이지만, 그 무게가 날 짓누른다.


복도에서 물을 마시며 손목을 주무르다 문득 미래가 스쳐갔다. 결혼 2년차지만 아직 아이가 없는 나. 이 병원에서 계속 일하다 언젠가 서울로 이직할까? 지방 간호사의 이직률이 22%라는 통계(한국간호협회, 2023)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남편이 "너무 힘들어 보인다"고 걱정하던 눈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면 누가 이 분만실을 지키겠나?


새벽에서 낮으로, 손끝의 흔적


오후 3시, 교대 시간이 됐다. 분만실을 나서며 뻐근한 손목을 풀던 중, 방금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그 소리는 피로를 넘어선 보람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안개 낀 산이 눈에 들어왔다. 입안에 남은 커피의 쓴맛이 하루를 정리하는 듯했다.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간호사는 생명을 잇는 손이야." 그 말이 오늘도 나를 버티게 했다.


산부인과 간호사는 생명의 시작을 돕는다. 하지만 지방 병원의 열악한 환경과 감정 노동은 나를 지치게 한다. 2023년 조사에서 간호사의 업무량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40%에 불과했다. 아기의 첫 숨소리와 산모의 미소를 위해 뛰는 우리에게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 낡은 장비, 부족한 인력 속에서도 생명을 잇는 손길이 멈추지 않도록, 사회가 이 노고를 더 따뜻하게 보듬어 주길 바란다. 나의 손끝은 오늘도 그 증거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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