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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변호사 Sep 29. 2015

토사구팽에 대한 심층적 이해

■ Intro


A : 김 부장님 얘기 들었어?
B : 참 황당하더라. 이번에 완전히 물먹어서 지방 공장으로 내려갔다면서?
A : 솔직히 최 이사님 이번에 전무 승진한 건 순전히 김부장님 덕이잖아?
B : 내 말이... 아니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보필했는데, 본인은 전무되고, 충성을 다 한 김 부장은 좌천을 시켜? 그게 말이 돼?
A :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더니... 토사구팽이라. 옛 말이 틀리질 않아.

■ 개념 / 의미


兎死狗烹(兎 토끼 토 / 死 죽을 사 / 狗 개 구 / 烹 삶을 팽)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하던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는 뜻으로, ① 필요할 때 요긴하게 써 먹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혹하게 버린다는 뜻, ② 일이 있을 때는 실컷 부려먹다가 일이 끝나면 돌보지 않고 헌신짝처럼 버리는 세상 인심을 비유해 이르는 말



■ 출전


1. 《사기(史記)》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범려는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 왕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멸하고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보좌한 명신(名臣)이다. 월나라가 패권을 차지한 뒤 구천은 가장 큰 공을 세운 범려와 문종(文種)을 각각 상장군과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범려는 구천에 대하여 고난을 함께할 수는 있지만 영화를 함께 누릴 수는 없는 인물이라 판단하여 월나라를 탈출하였다.

제(齊)나라에 은거한 범려는 문종을 염려하여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蜚鳥盡, 良弓藏, 狡兔死, 走狗烹)"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피신하도록 충고하였으나, 문종은 월나라를 떠나기를 주저하다가 구천에게 반역의 의심을 받은 끝에 자결하고 말았다.


2. 《사기(史記)》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果若人言 狡兎死良狗烹 飛鳥盡 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과약인언 교토사 주구팽 비조진 양궁장 적국파 모신망 천하이정 아고당팽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도다. 약삭빠른 토끼가 죽으면 토끼를 뒤쫓던 개는 삶아 먹고

나는 새를 다 잡고 나면 활 만드는 사람은 물러나고 적을 물리치면 계략을 세우던 신하는 죽임을 당한다.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도 마땅히 팽당하겠구나.


- 대장군 한신이 한고조 유방에 의해 반역죄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탄식하면서 한 말 -


■ 대표적 사례


1. 문종과 범려


문종과 범려는 월나라 왕 구천이 와신상담 끝에 오왕 부차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도운 일등 공신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운명은 훗날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문종은 범려와 비교할 때 구천을 위해 훌륭한 계책을 더 많이 내놓았다. 그야말로 머리를 쥐어짜냈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결과는 그의 승리였다. 오나라왕 부차는 자살하고 구천은 잠시나마 제후들의 패자를 칭할 수 있었다.

구천이 오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오자 대신들은 모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구천은 기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대부 범려는 이 광경을 보고 조용히 탄식하면서 말했다.

"대왕은 대신들의 공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구나. 앞으로는 공이 높은 사람들이 계속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없을 거야. 공이 많은 대신들을 시기하는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 있어."

범려는 내친김에 정상에 올랐을 때 내려온다는 말처럼 구천에게 조용히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연히 구천은 깜짝 놀랐다. 계속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문종에게 편지를 썼다.범려는 자신과 고생을 함께한 형제 같은 동지들에게 물러날 것을 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대는 오나라 왕 부차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가? 그것은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충실한 사냥개도 쓸모가 없어져 삶아 먹힌다. 적국이 망하면 지략을 내놓은 신하는 죽는다' 라는 말이지. 그대는 우리 대왕의 인간성을 아마 잘 알고 있을 것이네. 그는 목이 아주 길고 입은 새 입처럼 뾰쪽하지.그는 이미 치욕을 잘 참는 모습을 보여줬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공을 질투하고 있지. 이런 사람은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어도 안락함은 함께하기 어렵다네.
지금 그는 아직 그대를 시기하지 않고 있어.내 생각에 그대도 이 틈을 타서 빨리 관직을 그만두고 은퇴하는 게 좋을 것 같네. 만약 내 말을 믿지 않으면 나중에 틀림없이 그의 악랄한 손에 당하고 말걸세."

구천은 범려의 말대로 오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논공행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공이 자신에게만 있고 다른 대신들은 아무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구천은 자신과 함께 고생한 옛 신하들과 점점 멀어졌다. 심지어는 얼굴을 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많은 대신들은 이 현실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마치 경쟁하듯 사표를 내고 은퇴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문종은 달랐다. 범려의 말을 믿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구천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했던 탓에 그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는것으로 불만을 대신했다.


이때 어느 간신이 구천에게 무고하는 고자질을 했다.


"문종은 자신의 공이 높다고 오만방자하게 뻐기고 있습니다. 또 대왕이 후한 상을 내리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는 것도 다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천은 당연히 문종의 뛰어난 능력을 지극히 잘 알고 있었다. 계속 놔뒀다가는 그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어느 날 구천은 직접 문종의 병문안을 갔다. 문종은 짐짓 병이 위중한 것처럼 보이면서 구천을 맞이하는 시늉을 했다. 구천은 몸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놓은 채 문종과 얘기를 나눴다.

한참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구천이 엉뚱한 말을 했다.

"포부가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몸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더이다. 대신 자신의 이상이 실현되지 않을까 노심초사 한다고 하오. 그대는 과거 일곱 가지 계략을 내놓았소. 나는 그중 세 가지 계책을 이용해 오나라를 멸망시켰소.그대는 나머지 남은 네 가지 계책으로 어느 나라와 맞서면 좋겠다고 생각하오?"

문종이 대답했다.

"저는 어느 나라와 맞서 싸워야 할지 모릅니다!"

구천이 다시 말했다.

"그러면 그대는 나머지 네 가지 계책을 내 아버지가 계시는 그곳으로 가서 쓰시오."
구천은 말을 마치자 몸을 일으켜 나갔다.
풀어놓은 검은 그대로 그 자리에 남겨둔 채였다. 문종은 그제야 구천의 뜻을 알 것 같았다.

문종은 탄식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범려의 권고를 듣지 않아 마지막에 구천에게 죽임을 당하게 됐구나.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문종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구천이 남겨둔 칼로 자결했다.


2. 유방과 대장군 한신


한신은 유방을 도와 항우를 물리치고 한(漢)나라를 건국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장수이다.


그러나 오히려 천하 대업을 이룬 후 둘의 본격적인 균열은 시작되었다.

유방은 자신의 숙적이었던 항우의 옛 부하 종리매(鍾離昧)가 한신과 비밀리에 접촉을 가지다가 항우가 죽은 후에 한신에게 귀순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에 유방은 그를 체포하여 법대로 처리하라는 명령을 하였다. 이때 한신은 초왕에 갓 부임하여 많은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다녔는데 이것은 유방의 의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한 고조 6년(BC 201)에는 또 어떤 사람이 유방에게 한신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밀고하였다. 이로써 유방은 한신을 없애야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마침내 유방은 진평의 계책을 받아들여 초나라의 운몽(雲夢)에 순행을 간다는 것을 구실로 한신을 사로잡고자 하였다. 유방은 일단 제후들에게 초나라 서쪽 경계의 진(陳)에서 회동하자는 통보를 하였다. 한신은 그 소식을 듣고 유방의 의도가 의심스러워,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니 자기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고, 유방을 만나자니 체포될 것이 두렵고 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한신은 부하들의 진언을 받아들여 12월에 유방이 진(陳)에 도착하였을 때 종리매의 머리를 가지고 유방을 알현하러 갔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유방은 여전히 그를 체포해 버렸다. 유방은 낙양(洛陽)으로 돌아온 후 한신의 모반 사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였으나 아무런 혐의가 없자 그를 다시 석방하고, 회음후(淮陰侯)로 강등하여 장안(長安)에 거주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한신은 항상 병을 핑계로 조회에도 나가지 않고 밤낮으로 유방을 원망하면서 불만에 찬 나날을 보냈다.


그후 한신은 막강한 대군을 보유한 변방의 장수 진희(陳稀)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BC 196년 진희가 대(代)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유방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정벌에 나섰지만 한신은 병을 핑계로 출전하지 않고 계획대로 내부에서 진희의 반란에 호응할 준비를 하였다. 그는 가신들과 모의하여 밤에 병력을 동원하여 여태후와 태자를 습격하기로 하였으나 그만 여태후에게 비밀이 누설되고 말았다. 여태후는 소하와 긴밀히 의논하여 진희의 반란이 진압되었으니 모든 신하들에게 입궐하여 축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소식을 들은 한신은 의아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입궐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장락궁(長樂宮)에 들어서자마자 즉시 체포되어 종실(鍾室)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한신은 다시 후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녀자의 속임수에 걸려 죽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늘의 운명이란 말인가!"

                 


3. 주원장


토사구팽을 가장 확실히 한 것은 명태조 주원장이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나라를 통일하고 나고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단행함.

1380년 호유용과 관련자 15,000명 처형
1384년 이문충 독살
1385년 서달처형
1390년 이선장과 호유용관련자 15,000명 처형
1393년 남옥과 호유용관련의심자 20,000명 처형


4. 이방원(태종)과 이숙번


이숙번은 이방원의 오른팔.

제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정사 2등 공신, 그리고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좌명 1등 공신으로 추대되었다.

이숙번은 무인으로서는 공이 가장 많았거니와 또한 젊은 혈기와 나이, 능력이 있었기에(조선시대 최초로 치러진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 문무를 겸비한 특수한 인물) 조선의 수성(守城) 과정에는 앞으로 대권을 이을 세자(세종대왕)에게 상당한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이방원.

그 결과 이숙번은 철저히 권좌에서 내쳐지게 된다(어찌보면 죽음을 당하지 않는것만 해도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물론, 이 이면에는 이숙번 스스로 붕당(朋黨) 즉, 당여(黨與)를 만들면서 언행이 매우 방정하고 모질었기에 그래서 대소신료들의 들의 질시를 한 몸에 받았던 이유도 있다.                       


5. 중종과 조광조


조선 종중때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조광조를 중용하게 된다. 이리하여 대과 급제로 중간 간부가 된 조광조는 급제 3개월 만에 보수파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조정을 시끄럽게 만든다. 이를 계기로 중종 임금의 주목을 받은 조광조는 여러가지 개혁과제를 추진하고 중종반정 때의 국가유공자인 정국공신의 숫자를 대폭 축소해서 기득권층에게 정치적·경제적 타격을 주게된다. 조광조가 개혁 과제를 대략적으로 마무리한 때는 중종 14년 11월 11일(양력 1519년 12월 2일)이다. 정국공신의 숫자를 117명에서 29명으로 축소한 정국공신 개정작업이 조광조 개혁의 대미였다. 정국공신 자격을 박탈당한 보수파 인사들은 국가에서 받은 토지와 명예를 반환해야 했다. 이렇게 개혁을 일단락 짓는 데 소요된 시간은 대략 4년이었다.

그런데 정국공신 개정작업이 마무리된 지 4일 뒤였다.

개혁의 성공에 대한 기쁨이 조광조 진영에 아직 넘쳐나고 있을 때였다. 꿈속에서도 승리의 기분에 들떠 있을 그들의 단잠을 깨우는 일이 중종 14년 11월 15일(1519년 12월 6일) 밤중에 발생했다.

조광조를 비롯한 개혁파 8인방의 집에 임금이 보낸 체포조가 들이닥친 것이다. 새벽에 열린 긴급 어전회의(일종의 비상국무회의)의 결과로 개혁파에 대한 일망타진이 단행된 것이다.


                   


누구보다도 충격을 받은 것은 조광조였다. 그는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다.조광조는 임금을 만나게 해달라고 계속 요청했다. 주상 전하를 직접 만나면 해결될 거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중종을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중종에게 그런 마음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조광조와 중종은 동상이몽 관계였다. 중종은 자신의 왕권을 위해 조광조를 기용했던 것이고,  조광조는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해 군주의 힘을 빌릴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토사구팽이 발생하는 이유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고용되는 직원은 젊고 경험이 적은 사람, 급료가 싼 사람, 무엇이든 해주는 유형의 직원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회사에 큰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경험을 쌓기 위해서 어떤 일에도 불평없이 무턱대고 노력해 줄 것이다. 회사도 그 시기는 사업 내용과 방향도 분명히 정해져 있지 않아 적은 인력으로 다양한 업무를 소화하기 위해 직원 모두가 다양한 역할을 경우가 많다.

그러나 회사가 성장기에 들어가면 그들의 회사에서의 가치가 급격히 내려가 버린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회사의 성장 속도가 그들의 성장 속도를 뛰어 넘기 때문이다.


또한, 회사가 성장하면 예산에 여유가 생겨 각각의 업무에 풍부한 경험이 있는 우수한 직원을 고용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초기에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던 직원은 성장기에 입사한 우수한 직원으로 구성되기 시작한 팀에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설립시 필요할 때 어울린다고 생각한 직원의 가치는 회사가 성장기에 들어가면 크게 변해 버린다.
예를 들어 로켓이 분사 할 때 필요한 장비와 궤도에 올려 놓기위해 사용되는 장치가 다른 것처럼, 성장기에 필요한 것은 성숙한 조직에서의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이며 그 전문가들이 회사를 당기고 성장시켜주는 것이다.


돈도 없고 회사의 시스템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을 때, 설립자의 말만 믿고 무턱대고 열심히 해준 초기멤버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직원도 회사생각을 하면 그만두고 싶지 않은 마음도 크다. 그러나 여기서 명심해야 갈 수없는 회사의 단계에 따라서 필요한 인재는 다르다는 것. 또한, 회사의 초기부터 함께했던 것 때문에 능력 이상의 포지션을 주는 것은 큰 실수이다. 회사의 성장을 최우선으로 원한다면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성장기에는 직원의 교체가 필요하다.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1970년대 초에 펴낸 ‘미래의 충격’에서 누구나 지도급 지위에 오르면 자리가 낮았을 때 사귀었던 친구들부터 정리하라고 충고한다. 낮은 자리에 있을 때의 친구는 성공한 자신에게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새로 사귀는 친구들과도 융화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출세한 사람은 이용가치가 없는 왕년의 죽마고우(竹馬故友)나 학창시절의 단짝을 되도록 빨리 잊어야 앞으로의 출세에 지장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미래충격’은 옛날 친구를 버리는 구체적인 방법까지도 소개하고 있다. 옛날에 다니던 사교클럽이나 동호인 모임에는 가끔 빠지다가 나중엔 아예 발길을 끊으라,
부하의 가정에 초대 받았을 때는 응낙해도 좋지만 답례를 할 때는 반드시 부하 여러명을 동시에 초대하는 형식을 취하라 등등.


 

사구팽에 실패한 사례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이른바 ‘왕위 찬탈자’다. 따라서 그에게는 챙겨줘야 할 공신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세조는 한명회, 신숙주, 홍윤성, 권람 등의 공신들을 등극 후에 제거하기는커녕 오히려 후하게 대우해 그들의 지위를 탄탄히 해주었다. 한명회 등은 그 후 성종이 보위에 오르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워 성종마저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예전 TV에서 방영되었던 역사드라마 ‘왕과 나’에선 성종이 공신들 앞에서 자기주장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을 자주 드러내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도 일치하는 대목이다. 조선 왕조의 총체적 비극은 세조 때 싹 터 성종 때 절정기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공신들은 기득권을 틀어쥐고 변화와 개혁을 외면한 채 국정과 왕실을 좌지우지했다. 이는 성종이 자기의지대로 국사를 펼치지 못하게 했고, 의지와는 무관하게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를 폐출케 했으며 끝내 그녀의 사사(賜死)를 막지 못했다. 그 결과 보위에 오른 연산군은 모후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죄를 물어 관련자들을 숙청하는 피바람을 일으켰다.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명을 살해하고, 한명회는 이미 죽었지만 주검을 다시 파내어 부관참시 했으며, 그 일을 획책한 할머니(대왕대비) 한씨 또한 죽음을 면치 못했다.


■ 토사구팽에서 배우는 처신


토사구팽 자체는 비인간적이지만, 토사구팽을 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힘을 절제하지 못했거나 과거의 성공만 믿고서 내 생각은 늘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모두 틀렸다고 생각하는 독단을 가진 경우'도 있다.

한신의 경우 가제왕(假齊王 ; 제나라 대리 대왕) 책봉과 관련된 해프닝을 주목할 필요가 았다.


항우와 유방이 대륙의 패권을 두고 싸우던 중 유방이 항우에게 포위되어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때 유방의 장수 한신이 산동의 넓은 땅을 모두 점령한 뒤 유방에게 자신을 가제왕(제의 대리왕)으로 봉해달라고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유방은 매우 화가 나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군인 내가 포위되어 위태로운데 구하러 오지는 않고 저만 왕이 될 생각을 하고 있다니!”

하지만 유방은 책사인 장량의 만류로 화를 거두고 한신을 가제왕이 아닌 진짜 제의 왕으로 임명했다. 이후 한 신은 온 힘을 다해 유방을 도왔고, 유방은 결국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을 겪으면서 유방은 한신을 ‘언젠가는 손 봐야 할 녀석’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마천은 사기 회음후 열전 말미에 한신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다.


"한신의 공로는 저 주공, 소공, 태공망의 공훈에 비길만하니 그가 도리를 배워 겸양하고 자신의 공로와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랬다면 그의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원훈으로서 제사를 받았을 것이다. 천하가 이미 통일된 이후에야 반역을 일으켜 일족이 몰살 당했으니 그또한 슬픈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사냥이 끝나면 더 이상 사냥개가 필요하진 않다.

그런데도 계속 사냥 중으로 착각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린다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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