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 지갑 속 명함이 유난히 묵직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경력은 쌓이는데, 나는 단단해지는 걸까, 굳어지는 걸까. 이게 정말 '나'를 증명해줄까. 아침 회의실의 익숙한 탁자, 익숙한 피로감. 문득 창밖을 보며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그린다.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말은 이럴 때 참 달콤하다. 지친 영혼을 위한 마법 양탄자라도 되는 것처럼.
# 낡은 지도
하지만 우리, 어렴풋이 아는 것 아닐까. 장소를 옮겨도 '나'는 그대로라는 걸. 가장 무거운 짐, '나'라는 낡은 지도를 고스란히 들고 이 부서에서 저 부서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간다. 그래 봐야 풍경이 바뀔 리 없다. 이사 첫날의 설렘, 새 사무실의 낯선 공기가 '변화'라고 속삭이지만, 그건 착각이다. 똑같은 영화를 극장만 옮겨 다니며 보는 셈이다. 스크린은 그대로인데, 좌석의 안락함이 좀 달라졌을 뿐. 이건 변화가 아니라 변화를 연기하는 것에 가깝다.
우리는 안다. 아는 것은 언제나 쉽다.
# 한 번의 큰 죽음
동양의 선(禪)에서 말하는 '대사일번(大死一番)'이라는 게 있다. 크게 한 번 죽는다는 뜻이다. 낡은 '나'의 완벽한 소멸. 서른의 우리는 이 말이 불편하다. 이제 겨우 무언가를 쌓아 올리기 시작했는데, 죽으라니. 소멸이라니. 이게 왜 필요할까.
진짜 풍경이 바뀌는 건 서 있는 땅이 변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보던 '눈', 즉 낡은 자아가 그 자리에서 죽었기 때문이 아닐까. 필름의 제왕이던 코닥을 생각한다. 그들은 디지털 기술을 가장 먼저 개발하고도 왜 몰락했을까. '새로운 장소'를 몰랐던 게 아니다. '우리는 필름 회사'라는 그 견고한 정체성,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을 스스로 파괴하지 못했다. 그 견고한 성채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임을 끝내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낡은 풍경과 함께 가라앉았다.
# 빈손으로 걷기
서른의 우리는 무엇을 그토록 꽉 쥐고 있을까. 지난 10년간 애써 모은 것들이다. '전문성'이라는 이름표, '인맥'이라는 연락처 목록, '성공'이라 믿었던 낡은 방정식. 그것들이 나를 지켜줄 갑옷이라 믿는다. 하지만 갑옷은 때로 성장을 막는 족쇄가 된다. AI가 인간의 지성을 대체한다는 이 시대에, 정작 중요한 건 '무엇을 더 배울까'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나는 무엇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닐까.
손에 쥔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게 정말 '나'일까. 빈손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때, 어쩌면 그 빈 곳에서만 새로운 것이 자라날 수 있다. 낡은 지도를 버려야만, 길은 걷는 자의 것이 된다. 이건 어떤 방법론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우리 삶에 대한 관찰일 뿐이다.
#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이 말은, 이제 보니 달콤한 위로가 아니었다. 낡은 세계를 부수라는, 가장 날카롭고 능동적인 결단의 촉구다. 어디로 떠나기 전에, 먼저 내가 서 있는 이 견고한 땅을 의심해볼 일이다.
다이너마이트처럼 거창한 폭발이 아닐 수도 있다. 그저 낡은 껍질이 안에서부터 조용히 부서져 내리는 일일지도. 모든 것이 사라진 그 텅 빈 공백. / 그 위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한 번도 상상 못 한 새로운 세계와 만난다.
/ 낯선 내가, 그곳에 서 있다.
그것이 아마, 존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