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서가 깜빡인다. 빈 화면 앞에 앉아 있다. 한 시간째다. 문서 제목만 덩그러니 있다. 시작을 못 한다. 아이디어는 있다. 할 말도 있다. 그런데 첫 문장이 안 나온다. 완벽하게 쓰고 싶어서. 한 번에 제대로 쓰고 싶어서. 그러다 시간만 가고, 마감은 다가오고, 불안은 커진다. 결국 급하게 써낸다. 왜 이럴까. 게으른 걸까. 아니다. 두렵다. 잘 못 쓸까 봐. 형편없을까 봐.
# 완벽함이라는 갑옷
완벽하게 준비하면 성공한다고 배웠다. 완벽한 계획, 완벽한 실행, 완벽한 결과. 그래야 인정받는다고. 실패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준비한다. 더 준비한다. 언제까지? 완벽해질 때까지. 그런데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확신이 안 선다. 그래서 더 미룬다.
플라톤이 뭐라고 했던가. 시작이 모든 일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맞는 말이긴 한데, 우리는 시작을 제일 어려워한다. 시작이 완벽하지 않을까 봐.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다 틀어진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어느 게 맞는 구멍인지 확신이 설 때까지 첫 단추를 못 끼운
다.
진짜 문제는 완벽주의 자체가 아니다. 그게 만드는 마비다. 완벽을 추구할수록 불완전함이 더 무섭다. 무서울수록 얼어붙는다. 목표는 저기 있는데, 완벽한 길을 찾을 때까지 한 발도 안 뗀다. 그러는 사이 기회는 옆을 지나간다.
# 불완전하게 시작하는 사람들
초안을 쓴다. 형편없다. 문장 어색하고, 논리 약하고, 표현 투박하다. 그래도 일단 있다. 빈 화면이 아니다. 뭔가 적혀 있다는 게 중요하다. 이제 고칠 수 있으니까. 완벽한 첫 문장을 기다리는 대신, 형편없는 첫 문장이라도 일단 썼다는 게.
작가들 얘기 들어보면 그렇다더라. 첫 초안은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쓴다고. 어차피 고칠 거니까. 일단 쓰고 본다는 거다. 그러면 뭔가 보이기 시작한다. 어디가 약한지, 뭐가 빠졌는지. 안 쓰면 절대 안 보인다.
프로토타입이라는 것도 그렇잖나. 제품 만들 때 완벽한 걸 처음부터 만들지 않는다. 대충 만든다. 작동만 하게.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반응 보고, 고치고, 다시 보여주고. 그렇게 완성된다. 완벽 추구했으면? 시장 나오기도 전에 망했을 거다.
일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보고서 쓰려다 못 쓴다. 그럴 바엔 개요만 잡는다. 목차만 만든다. 각 섹션에 키워드만 툭툭 던져놓는다. 그게 초안이다. 거기서 시작해서 살을 붙인다. 완벽하진 않아도 형태는 있다.
# 시작하는 방법
그럼 어떻게 시작하냐고. 작게 시작하면 된다. 정말 작게.
목표부터 바꾼다. "완벽한 제안서"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제안서 첫 페이지만". "훌륭한 프레젠테이션" 대신 "슬라이드 딱 3장". 할 수 있을 만큼 작게 쪼개는 거다.
시간도 정해놓는다. 30분이든 1시간이든. 그 안에 뭐든 만든다. 완성도는? 나중 얘기다. 일단 채운다. 시간 끝나면 손 뗀다. 완벽하지 않아도 뭔가는 있다.
그리고 보여준다. 누구한테든. 동료, 친구, 상관없다. "이거 어때?" 물어본다. 부끄럽다. 형편없어 보인다. 그래도 상관없다. 피드백 받고, 고치고, 그게 다음 버전이 되는 거다.
완벽한 걸 한 방에 만드는 사람은 없다. 불완전한 걸 계속 고쳐가는 사람만 있다. 그게 일이고, 그게 창작이다.
미루는 건 게으름이 아니다. 두려움이다. 완벽하지 못할까 봐 무서워서 시작을 못 하는 거다. / 완벽은 나중 생각이다. / 일단 시작한다. 형편없어도 괜찮다. 시작 안 하는 것보단 백배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