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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이라는 칼날, 인성이라는 손

by 조우성 변호사

[능력이라는 칼날, 인성이라는 손]

오타니 쇼헤이가 홈런을 치고 베이스를 돈다. 관중석이 들썩인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그가 벤치를 정리하는 장면, 통역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화면에 잡힐 때가 있다. 이상하다. 50호 홈런을 볼 때의 전율과는 다른 종류의 감동이 밀려온다. 우리는 그의 능력을 찬탄한다. 하지만 겸손을 사랑한다. 이 둘은 같은 것일까.

능력은 측정할 수 있다. 타율, 방어율, 음역, 박자감. 매출, 생산성.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성은 어떤가. 친절함과 겸손함, 배려와 존중. 이건 눈금 없는 자로 재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인성을 평가한다. 어떤 가수가 뛰어난 실력으로 무대를 장악하다가도, 대기실에서 스태프를 함부로 대했다는 소문 하나면 충분하다. 그의 노래가 갑자기 귀에 거슬린다. 음정은 그대로인데 듣는 귀가 달라진 것이다.

# 능력만으로 충분한가

"가수는 노래만 잘하면 된다." 일견 맞는 말처럼 들린다. 운동선수는 운동만, 의사는 수술만, 작가는 글만 잘 쓰면 된다는 식이다. 각자의 영역에서 탁월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명제는 왜 공허하게 들리는가. 노래 잘하는 불친절한 가수보다 노래도 잘하고 친절하기까지 한 가수를 우리는 왜 선호하는가. 심지어 전자의 실력이 더 뛰어나다 해도.

역설이 있다. 능력 없이 인성만 좋은 사람은 무력하다. 노래 못하는 겸손한 가수, 공 못 차는 성실한 선수, 수술 못하는 친절한 의사. 이들의 인성을 호명하는 사람은 없다. / 인성은 능력이라는 무대 위에서만 빛을 발한다. / 그렇다면 인성은 능력의 부록에 불과한가. 그런데 반대 상황을 보자. 능력 있는 사람의 나쁜 인성이 드러날 때 우리가 느끼는 그 배신감의 강도를. 단순한 실망이 아니다. 분노에 가깝다. 이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가.

# 능력은 칼이다, 문제는 누가 쥐고 있느냐이다

능력은 칼이다. 칼은 쓰는 이의 손에 따라 무기가 되거나 도구가 된다. 뛰어난 외과의사의 손은 생명을 살린다. 하지만 같은 손이 오만함으로 환자를 대할 때, 그 칼은 존엄을 베는 칼날이 된다. 천재 작곡가의 재능은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지만, 그 재능을 휘두르며 동료를 짓밟을 때 음악은 폭력이 된다. / 능력이 크면 클수록 영향의 반경도 커진다. 선하게 쓰일 때는 축복이지만, 악하게 쓰일 때는 재앙이다. / 우리가 능력 있는 사람의 인성을 묻는 것은 그가 손에 쥔 칼을 어떻게 휘두를 것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성은 능력의 사용 설명서라고 할 수 있을까.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 능력을 어떤 방향으로 쓸 것인지, 누구를 위해 쓸 것인지, 어떤 한계 안에서 쓸 것인지를 예측하게 하는 지표. 오타니가 겸손한 것은 그의 재능이 자기 과시가 아니라 팀의 승리를 위해, 야구라는 경기 자체를 위해 쓰일 것임을 암시한다. 반대로 어떤 스타 선수가 오만하고 이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때, 우리는 그의 재능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쓰일 것임을 직감한다. 같은 실력이라도 전자는 동료가 되고 후자는 그저 경쟁자일 뿐이다.

현대 사회는 복잡한 협력의 그물망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가장 뛰어난 축구 선수도 팀 없이는 경기할 수 없고, 천재 과학자도 연구팀 없이는 논문을 쓸 수 없다. 협력은 신뢰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신뢰는 능력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능력이 뛰어날수록 의심이 커진다. 저 사람이 그 능력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인성은 이 의심을 낮추는 장치이다. "저 사람은 실력이 뛰어나지만 나를 짓밟지 않을 것이다.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존중할 것이다." 이런 신뢰가 있을 때 협력이 가능하다. 인성은 거래비용을 낮추는 사회적 자본이다.

# 우리가 품은 이중 잣대

그런데 우리는 모순 속에 산다. 천재 예술가의 괴팍함은 낭만화되고, 스티브 잡스의 폭군적 리더십은 혁신의 증거로 포장된다. "위대한 업적을 이루려면 어느 정도의 광기와 오만함이 필요하다"는 변명이 통용된다. 그러면서도 평범한 직장 상사의 작은 무례함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 이중 잣대는 뭔가. 결과가 탁월하면 과정의 폭력을 묵인하는가. 능력의 크기가 인성의 결함을 상쇄하는가.

직장에서 능력은 뛰어난데 성품이 나쁜 사람을 떠올려보자. 프로젝트는 성공시킨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동료들을 소진시킨다. 마감을 맞추지만 후배들의 자존감을 깎아낸다. 매출을 올리지만 팀의 사기를 꺾는다. 반대로 능력은 평범한데 성품이 좋은 사람. 탁월한 결과를 내지 못하지만 팀의 응집력을 높인다. 빠르게 성장하지 못하지만 후배들이 그에게서 배우고 싶어 한다. 조직의 생산성을 생각하면 전자가 필요하다. 조직의 지속가능성을 생각하면 후자가 필요하다. 우리는 둘 다 원한다. 하지만 둘 다 얻기는 어렵다.

더 깊은 질문이 있다. 당신이 중대한 수술을 앞두고 있다고 해보자. 두 명의 외과의사. 한 명은 실력이 뛰어나지만 오만하고 환자를 무시한다. 다른 한 명은 실력이 조금 떨어지지만 친절하고 환자의 말을 경청한다.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대부분은 전자를 선택한다. 생명이 걸린 문제에서 인성은 사치가 된다. 하지만 수술이 끝난 후 당신은 그 의사를 존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능력에 감사하되, 그를 인간으로서 존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 능력은 필요를 충족시키지만 인성은 존경을 낳는다. /

#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는 것

우리가 오타니의 겸손에 감동하는 건 그의 재능 때문이 아니다. 재능을 다루는 그의 방식이 우리 내면의 어떤 이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이어야 한다는, 칸트 이래의 오래된 윤리적 직관. 능력 있는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타인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쓸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그것은 인간을 수단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능력 있는 사람이 겸손하고 배려할 때 우리는 안도한다. 그의 능력이 우리를 짓밟지 않을 것이라는, 오히려 우리를 고양시킬 것이라는 희망.

인성이 능력의 부가가치가 아니라 능력과 인성이 함께 온전한 인간을 구성한다는 말은 진부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런데 진부함 속에 진실이 있다. / 능력은 '할 수 있음'의 영역이고 인성은 '해야 함'의 영역이다. / 전자는 가능성의 문제이고 후자는 방향의 문제이다. 가능성만 있고 방향이 없으면 그건 맹목적 힘이다. 방향만 있고 가능성이 없으면 그건 무력한 이상이다. 둘이 만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행위가 탄생한다.

우리는 능력 중심 사회를 표방한다. 학벌이 아니라 실력을, 연줄이 아니라 성과를 보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순수한 능력주의는 냉혹하다. 쓸모없는 자는 제거되고 약한 자는 도태되는 세계. 우리가 그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인간이 단지 기능의 집합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능력으로 평가받기를 원하면서도 능력 너머의 무언가로 존중받기를 바란다. 이 모순된 욕망이 인성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결국 능력과 인성의 관계는 완전히 분리될 수도, 완전히 통합될 수도 없다. 둘은 긴장 관계 속에서 서로를 견인한다. 능력은 인성에게 무대를 제공하고, 인성은 능력에게 방향을 제시한다. 능력 없는 인성은 추상적 덕목에 그치고, 인성 없는 능력은 위험한 무기가 된다. 우리가 오타니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가 이 둘의 균형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둘 모두에서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건 드문 일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더 갈고닦을 것인가. 칼날인가, 칼을 쥔 손인가.

(2025. 11. 3. 조우성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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