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본성의 이해] 피는 물보다 진하고, 불안은 사랑보다 질기다(진화심리학적 관점)
1. 온도의 차이
일요일 오후 4시, 마포구 공덕동의 아파트 거실에는 묘한 정적과 소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식기세척기가 종료음을 울리며 멈췄다. 김민정 과장은 싱크대 앞에서 젖은 행주를 꽉 짰다. 손목 안쪽이 시큰거렸다. 거실 소파 쪽을 돌아보았다. 시어머니가 5살 난 손녀의 입에 멜론 조각을 넣어주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눈길은 아이의 입을 향했다가, 이내 김 과장의 물 젖은 손으로 옮겨갔다.
"애가 좀 야윈 것 같구나. 밥은 잘 챙겨 먹이니?"
김 과장은 대답 대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기 속에 친정엄마가 지난주에 보내준 곰국이 꽁꽁 얼어 있었다. 친정엄마는 김 과장의 튼 입술을 보며 곰국을 보냈고, 시어머니는 손녀의 몸무게를 보며 며느리를 탓했다. 두 노인의 사랑은 그 질량과 방향이 달랐다. 김 과장은 냉장고 문을 닫았다.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고 억울한 것이 치밀어 올랐다. 남편은 소파 끝에 누워 야구 중계를 보고 있었다. 남편은 평온했고, 시어머니는 집요했으며, 김 과장은 철저히 혼자였다.
/ 내가 낳은 내 아이인데, 왜 나는 내 집에서조차 감시받는 기분이어야 하는가. /
명절이 지난 지 일주일이 넘었지만, 그날의 불쾌감은 사라지지 않고 집안 공기 속에 부유하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식탁 위 먼지처럼 내려앉았다. 도대체 이 지긋지긋한 도돌이표는 왜 멈추지 않는 것인가.
2. 유전자가 기록한 이중장부
이 숨 막히는 엇갈림을 단지 시어머니의 괴팍한 성격이나 며느리의 예민함 탓으로 돌리는 건 게으른 해석이다. 답은 훨씬 더 먼 곳, 우리의 의식이 닿지 않는 깊은 곳에 있다. 200만 년 전 아프리카 초원에서 우리 조상들이 마주했던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한정된 자원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였다. 실수는 곧 멸종이었다.
이 냉혹한 계산법은 지금도 우리 뇌 속에 '혈연 투자의 비대칭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진화심리학자 해럴드 오일러(Harald Euler)와 바바라 바이첼(Barbara Weitzel)은 1996년, 2천 명의 데이터를 분석해 흥미롭고도 잔인한 연구 결과(「조부모의 돌봄에 있어서의 차별적 투자」)를 내놓았다. 조부모의 사랑에도 등급이 있다는 것이다. 손주에게 가장 헌신적인 존재는 외할머니였고, 가장 무관심한 존재는 친할아버지였다. 친할머니는 그 중간 어디쯤 서 있었다.
왜 이런 차별이 생기는가. 핵심은 '확신'이다. 외할머니에게 딸이 낳은 아이는 100% 자신의 핏줄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친가(親家) 쪽은 다르다. 며느리가 낳은 아이가 아들의 핏줄이 아닐 가능성, 즉 '부성 불확실성(Paternity Uncertainty)'이 0.01%라도 존재하는 한, 무의식은 경보를 울린다.
/ 친가의 사랑에는 '의심'이라는 오래된 불순물이 섞여 있다. /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단순한 참견이 아니다. 그것은 유전적 연결고리가 불확실한 대상인 손주가 제대로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20만 년 된 생물학적 감시 카메라의 작동이다. 반면 친정엄마의 투자는 확실한 내 딸과, 그 딸이 낳은 확실한 내 손주를 향하기에 맹목적이고 전폭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21세기의 스마트한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뇌의 배선은 여전히 원시 시대의 불안을 송출하고 있는 셈이다.
3. 문화라는 이름의 굴레, 그리고 반론
그렇다고 해서 시어머니의 무례함에 면죄부를 줄 수 있을까? "유전자가 시켜서 그랬다"라는 말로 모든 상처를 덮을 수는 없다. 인간은 유전자의 명령에 복종만 하는 기계가 아니며, 우리는 본능 위에 '문화'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쌓아 올린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적 시선으로 보면 이 갈등은 권력의 문제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통찰했듯, 가족은 순수한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이 교환되는 장(field)이기도 하다. 한국의 가부장제는 오랫동안 며느리를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가문의 재생산 도구로 취급해왔다. 시어머니의 간섭은 유전적 불안을 넘어, 가부장적 위계질서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려는 사회적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진화심리학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오만도 경계해야 한다.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진화심리학이 모든 행동을 적응의 결과로 끼워 맞추는 '그럴싸한 옛날이야기(Just-So Stories)'가 될 수 있다고 1997년 논문에서 매섭게 비판했다. 현재의 차별과 억압을 "원래 그런 것"이라며 생물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유전적 경향성은 있을지언정, 그것을 갈등으로 증폭시키는 것은 한국 사회의 경직된 가족 문화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아야 한다.
4. 불안을 직시하는 힘
결국 시댁과의 갈등은 누군가의 도덕적 파탄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불확실성에 떠는 뇌의 오래된 본능과, 변화를 거부하는 문화가 빚어낸 합작품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해는 감정의 온도를 낮춘다. 시어머니의 날 선 말에서 '나에 대한 비난'을 지우고, '그녀의 불안'을 읽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소모적인 감정 싸움에서 한 발짝 물러설 수 있다.
/ 본능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로움에서 분리해내는 과정이다. /
그녀의 잔소리는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유전자가 불안해서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당신은 상황을 관조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틈을 얻게 된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라, 본성의 메커니즘을 꿰뚫어 봄으로써 얻는 주체적인 자유다.
이해한다고 해서 갈등이 마법처럼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당신이 억울함에 밤잠을 설치며 "내가 뭘 잘못했나"를 되뇌는 일은 멈추게 할 것이다.
/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20만 년 된 두려움의 그림자일 뿐이다. / 우리는 이제 그 그림자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다.
* 요약 인포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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