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묘한 순간들이 있다. 상대가 우리 제안을 듣고 "흥미롭네요"라고 말하는데, 뭔가 이상하다. 말은 긍정적인데 공기가 차갑다. 대형 M&A 건을 진행하던 어느 날, 상대측 대표의 입꼬리 오른쪽이 순간 삐죽 올라가는 걸 봤다. 0.2초도 안 되는 찰나였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 작은 신호가 이후 3개월간의 협상 결렬을 예고하는 줄은 몰랐다.
# 거울 앞에서도 잡기 힘든 표정
경멸의 미소는 얼굴 근육 중에서도 가장 미묘하다. 입술 한쪽 끝이 위로 당겨진다. 대부분 오른쪽이다. 0.2초에서 0.5초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라 본인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미간이 아주 살짝 좁아지고, 콧방울이 미세하게 들썩인다. 눈은 상대를 보고 있지만 초점이 흐리다. 현미경으로 벌레를 관찰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진짜 웃음과는 다르다. 진짜로 웃으면 양쪽 입꼬리가 함께 올라간다. 눈가에 주름이 생긴다. 얼굴 전체가 환해진다. 그런데 경멸의 미소는 입술 한쪽에만 머문다. 냉기가 느껴진다. 완벽한 가면을 쓰고 있다가 잠깐, 아주 잠깐 틈이 보이는 순간이다.
# 무시의 심리학
경멸은 분노와 다르다. 분노는 상대를 위협으로 본다. 동등한 상대로 인정하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경멸은? 상대를 위협으로 보지도 않는다. /애초에 싸울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하향 비교'의 극단이라고 부른다.
한국 비즈니스 문화에서 이것은 특히 위험하다. 우리는 위계를 중시한다. 상하 관계가 명확하다. 경멸의 표정은 그 서열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당신은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무언의 선언이다.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나온다. 편도체가 상대를 별 위협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전두엽의 검열을 거치지 않고 바로 얼굴 근육으로 신호가 간다. 그런데 의도적인 경우도 있다. 협상에서 상대 제안을 깎아내리거나, 조직 내에서 누가 위인지 확인시킬 때 쓴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려면? 다른 신호들을 함께 봐야 한다. /진짜 경멸은 동공 변화 없이, 호흡도 안정적으로, 편안한 자세와 함께 나타난다./ 몸 전체가 '여유'를 말하고 있다.
# 뇌 과학이 말하는 것들
폴 에크만이라는 심리학자가 있다. 그는 경멸을 인간의 기본 감정 일곱 가지 중 하나로 봤다. 재미있는 것은, 경멸 표정이 유일하게 비대칭적이라는 점이다. 기쁨, 슬픔, 분노... 다른 감정들은 얼굴 양쪽이 대칭적으로 움직인다. 경멸만 한쪽만 올라간다. 문화권을 막론하고.
뇌 스캔을 해보면 경멸을 느낄 때 섬엽과 전측 대상피질이 활성화된다. 이 부위들은 역겨움과 도덕적 판단을 처리한다. 뭔가 "더럽다" "틀렸다"고 느낄 때 작동하는 곳이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원시 시대, 집단 생활에서 무임승차자나 배신자를 빨리 알아채야 살아남았다. 협력이 생존의 핵심이었으니까. 경멸은 "저 사람 위험해, 거리 두자"는 신호였다.
존 고트만이라는 연구자는 부부 관계를 연구했다. /대화 중에 경멸 표정이 자주 나오는 부부는 93% 확률로 이혼한다고 한다./ 놀라운 수치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다. 경멸은 관계의 끝을 알리는 가장 강력한 신호다.
# 실전에서의 대응 전략
상대 얼굴에서 이 표정을 봤다면? 즉시 전략을 바꿔야 한다. 제안 구조를 수정하거나, 협상 담당자를 교체하거나, 일단 쉬어가자고 하거나.
채용 면접에서 면접관이 이 표정을 지으면 명확하다. 지원자가 자격 미달이라는 뜻이다. 반대로 지원자가 이 표정을 지으면? 회사 문화와 안 맞는다는 신호다. 어차피 뽑아도 오래 못 간다.
프레젠테이션 중에 청중 얼굴에서 이것이 보이면 곤란하다. 지금 하는 말이 먹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접근법을 바꾸거나 질문을 던져서 반대 의견을 끌어내야 한다.
더 어려운 것은 자기 얼굴 관리다. 나도 모르게 경멸의 미소를 짓고 있을 수 있다. /입꼬리를 의식적으로 누르는 것은 미봉책이다. 근본은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이 사람한테서 뭘 배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습관처럼 하면 경멸 자체가 줄어든다.
윤리적 선은 명확하다. 상대 표정을 읽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경멸을 드러내서 상대를 주눅들게 만드는 것은? 그것은 조작이다.
# 10년 전 그 회의실
계약 분쟁 조정 자리였다. 갑과 을이 합의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을사 대표가 제안을 하는데, 갑사 대표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갔다. 말은 안 했다. 그냥 그 표정만 지었다.
을사 대표 얼굴이 붉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가버렸다. 3년 동안 이어온 거래 관계가 그렇게 끝났다. 나중에 을사 대표가 한 말이 기억난다. /"계약 조건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무시당한 것이 참을 수 없었다."/ 0.2초가 수십억 원짜리 관계를 무너뜨렸다.
경멸은 감정 중에서 가장 독성이 강하다. 분노는 풀 수 있다. 슬픔은 공감받을 수 있다. 그런데 경멸은? 관계의 기반을 흔든다.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밀어붙인다.
오늘 회의에서 누군가의 입꼬리가 비대칭적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지 않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당신의 입꼬리는 어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