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 조명은 차갑다. M&A 협상이 네 시간째 이어지고 있다. 인수 조건을 담은 문서가 상대편 대표 앞으로 밀려간다. 그가 첫 페이지를 훑는다. 그리고 찰나, 오른손이 천천히 올라와 검지와 중지로 눈꺼풀을 누른다. 3초.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지우려는 것처럼. 손을 내리고 나서야 "검토가 필요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그의 뇌는 이미 결정했다. 거부.
이게 바로 '눈 비비기(Eye Blocking)'다. 대화 중 눈을 비비거나 손으로 가리거나 눈꺼풀을 문지르는 행동. 사소해 보이지만, 상대 내면에서 일어나는 강력한 심리적 저항을 드러내는 무의식의 신호다.
# 뇌가 현실을 거부할 때
눈 비비기는 진화 심리학의 '감각 차단(Sensory Blocking)' 반응에서 온다. / 우리 조상들은 위협적인 포식자나 불쾌한 광경 앞에서 본능적으로 눈을 감거나 가렸다. 보지 않으면 위험이 사라진다는, 원시적이지만 강력한 믿음. /
현대인의 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편도체(Amygdala)는 여전히 그 고대 프로그램을 돌린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치솟으면, 뇌는 신체에 신호를 보낸다. "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 결과가 눈을 가리는 행동이다.
신경과학자 폴 에크만(Paul Ekman)의 연구를 보면,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때 눈 주변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이 증가한다. / 눈 비비기는 단순한 신체적 불편함이 아니다. "이 현실을 거부하고 싶다" "이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한 말이 불편하다"는 무의식의 고백이다. / 특히 상대가 말하는 중이 아니라 중요한 정보를 '보는' 순간 이 행동이 나타난다면? 그건 시각 정보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 협상 테이블의 보이지 않는 언어
글로벌 투자은행의 M&A 전문가들은 이 신호를 '딜브레이커의 전조'라 부른다. 2019년 한 대형 제약사 인수 협상에서 있었던 일이다. 매도 측 CFO가 재무제표 실사 결과를 받아들고 연신 눈을 비볐다. 인수 측 협상팀은 즉시 알아챘다. "뭔가 숨기고 있다."
실제로 추가 조사 결과, 공시되지 않은 우발 채무 300억 원이 나왔다. / CFO의 눈은 그의 입보다 먼저 진실을 말했다. /
연봉 협상도 마찬가지다. HR 담당자가 제시한 연봉안을 보고 지원자가 눈을 비빈다? 실망했다는 뜻이다. 반대로 임원이 부하 직원 보고서를 읽다 눈을 가린다? 그 내용이 기대에 못 미친다거나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제품 프레젠테이션 중 마음에 안 드는 디자인을 보면 즉시 눈을 감고 이마를 짚었다고 한다. 그 순간, 팀원들은 알았다. 며칠 밤 새워 수정해야 한다는 걸.
# 무의식의 신호를 읽는 법
상대에게서 눈 비비기를 포착했다면 세 가지를 점검하라.
방금 제시한 정보나 조건 중 무엇이 문제인가. 상대는 거부하고 싶지만 명시적으로 표현 못 하는 상황인가. 이게 협상의 돌파구가 될 수 있는가.
직접적으로 "불편하신가요?"라고 묻기보다는 "혹시 추가로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까?" 같은 열린 질문으로 대화의 여지를 만들어라. / 상대의 무의식이 보낸 신호를 의식적 대화로 전환하는 것이다. /
# 당신의 눈을 통제하라
반대로 당신 자신이 눈을 비비고 있다면? 당신 뇌가 "이 상황이 불리하다"고 경고하는 중이다. 이럴 때는 의식적으로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거나 노트 필기 같은 대체 행동으로 전환하라. 중요한 협상이나 발표 전에는 얼굴을 만지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한다. 특히 눈 주변은 금지 구역이다.
당신의 눈이 당신의 전략을 배신하지 않도록.
눈 비비기는 가장 정직한 거짓말 탐지기다. 말은 거짓말할 수 있어도 뇌는 거짓말하지 못한다. 다음 회의에서, 협상 테이블에서, 누군가 눈을 가리는 그 3초를 주목하라. 그 짧은 순간이 거래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