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후배 변호사로부터 들은 사건 이야기를 다소 재구성했습니다.
대학에서 회계를 전공한 이성호씨(가명)는 첫 직장인 A사에서 6년간 근무하다가, 그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중견기업인 K정공 자금부서로 이직했다.
K정공의 박 사장은 자수성가한 50대 중반의 CEO였다. 대부분의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박 사장은 성실하고 치밀한 성격이었다. 거기다 박 사장에게는 다른 CEO들에게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장점을 갖고 있었다. 바로 자상한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었던 것이다.
박 사장은 부하 직원들을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해줬으며, 큰 형님 같은 푸근한 리더십을 보여줬다. 형님이 없던 성호씨는 박 사장을 형님처럼 생각하고 따랐다.
K정공은 박사장이 1대 주주였다. 따라서 회사의 대부분 중요한 결정은 박 사장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자금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성호씨는 특유의 꼼꼼한 성격으로 깔끔하게 업무를 처리했기에 박 사장은 자금업무의 실무는 전적으로 성호씨에게 일임했다.
그런데 성호씨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즉, 언제부턴가 박사장이 회사 돈을 빼서 자꾸 다른 회사 쪽으로 입금하고 있는 것을 성호씨가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입금 받는 회사의 대표이사가 박사장의 집안 친척이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량한 K 정공의 자금을 별다른 매출이 없는 신설법인으로 유출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성호씨는 회사를 걱정하는 마음에 회사의 자금 흐름을 면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분식회계와 부당한 자금유출의 규모가 컸다. 물론 K정공 직원들에 대한 급여는 정상적으로 지급이 되어 오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회사가 힘들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점에서 성호씨의 걱정이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그 조사과정에서 박사장이 비자금을 조성한 뒤 유관 기관 공무원들에게 정기적으로 뇌물을 상납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박 사장의 이러한 조치들이 회사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독실한 크리스챤인 성호씨에겐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 사장이 성호씨에게 신설법인으로 송금을 지시했다. 그런데 송금규모가 상당히 컸고, 송금의 근거로 내민 계약서는 누가 보더라도 급조한 것이 분명했다.
성호씨는 조심스럽게 박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님, 제가 이런 말씀 드릴 처지는 아니지만, 그 동안 자금업무를 하다보니 이런 저런 문제점이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성호씨는 조심스런 어조로 그 동안 자신이 느꼈던 문제점을 박사장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그러자 평소 자상하고 사람 좋던 박사장이 눈을 치켜떴다.
“제 주제를 모르고 어디서 훈수질이야? 사장이 우습게 보여? 오냐 오냐 해줬더니 지가 잘나서 그런 줄 아나 본데... 완전 주제파악 못하고 있구먼. 너 정도 직원은 얼마든지 널렸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될 거 아냐?”
성호씨는 박 사장의 막말에 너무 놀랐다. 자신이 악의를 가지고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회사 걱정을 위해서 조언을 한 것인데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다니. 그렇다면 그 동안 자신을 비롯한 직원들에게 보여줬던 박 사장의 행동은 모두 위선이었단 말인가.
성호씨는 몇 날 몇 일을 모멸감과 배신감에 힘들어했다. 결국 몇 일 뒤 성호씨는 사표를 제출했다.
사표를 제출하던 날 박 사장은 아무런 말없이 성호씨의 사표를 수리했다. 박 사장은 정해진 퇴직금 외에 약간의 위로금 봉투를 건넸지만 성호씨는 그 봉투를 받지 않았다.
그로부터 1달 후 K정공에 관할 검찰청 수사관들이 들이 닥쳤다. 법원으로부터 발부받은 압수, 수색영장을 제시했다. 수사관들은 관련 회계서류를 압수한 것은 물론이고, 박 사장과 핵심 측근들만 알고 있던 사장실 안쪽 금고 안 서류도 모두 가져갔다. 특히 금고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는데 수사관들은 그 금고의 비밀번호를 미리 알고 와서는 단번에 금고를 열고서 중요 서류를 가져간 것이다.
결국 박사장은 회사 자금의 유용, 관계 공무원에 대한 뇌물 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고, 뇌물을 받았던 공무원 2명도 구속되었다.
이 모든 일은 성호씨의 투서가 발단이었다.
성호씨는 K정공을 나온 후에도 박 사장이 자신에게 했던 그 모욕적인 말을 한 시도 잊을 수 없었다. 위선적인 박 사장에 대한 분노 때문에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성호씨는 ‘좋다. 나란 사람, 당신이 그렇게 우습게 볼 사람이 아님을 보여 주겠다’는 심정에 자신이 알고 있던 K정공의 비위사실들을 모두 정리한 다음 관할 검찰청에 익명의 투서 형식으로 제출했다. 투서 내용이 워낙 자세하고 신빙성이 있었기에 수사기관은 확신을 갖고 수사에 임했으며, 덕분에 관련 자료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공무원에 대한 뇌물공여 사건은 수사기관으로서는 언제나 중점적으로 다루는 사건이었기에 성호씨의 자세한 제보는 수사기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박 사장은 구속상태에서 재판을 받았고, K정공은 그 사건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특히 박 사장이 자금융통 및 운용을 혼자서 진행하고 있었기에 구속 3개월 만에 회사의 현금 흐름에는 큰 문제가 생겼고, 급기야 직원들의 급여가 체불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K정공 내부에서는 이 모든 일이 성호씨의 투서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알려졌다. 임금이 체불된 직원들 중에는 성호씨에 대해 반감을 갖는 사람도 생겨났다.
성호씨는 K정공을 나와 다른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호씨는 퇴근하는 길에 자신의 집 앞에서 괴한 2명으로부터 습격을 당했다. 마스크를 쓴 한 명이 성호씨를 앞에서 가로막았고, 다른 한 명은 뒤에서 둔기로 성호씨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때 성호씨가 들은 말은 “너만 살면 되냐? 이 배신자...”였다.
그 습격으로 성호씨의 뇌 속에 출혈이 발생했고, 결국 성호씨는 두개골을 절개하고 10시간 동안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 결과 성호씨는 다소 말이 어눌해졌고, 오른쪽 하반신은 마비증세가 왔다.
분명 박 사장 쪽의 사주를 받은 직원들에 의해 성호씨가 습격을 당한 것이니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하고 싶은데,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일을 진행하면 낫지 않겠냐면서 지인을 통해 나를 찾아온 것이다. 범인을 찾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호씨가 박 사장에게 느꼈던 분노의 한 가운데에는 ‘배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성호씨를 폭행한 그들 역시 성호씨더러 ‘배신자’라고 했다고 한다. 배신의 쌍곡선...
‘신뢰’를 저버린 것이 ‘배신’이므로 ‘배신’은 ‘신뢰’를 전제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배신감은 ‘실체 없는 신뢰’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건을 상담하다 보면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는 많은 의뢰인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문득 이런 질문을 해 보고 싶어진다.
‘과연 그렇게 배신감으로 괴로워할 만한 ‘신뢰’가 사전에 있었나요?‘라고. 내가 억지로 만들어 낸 ’실체 없는 신뢰‘를 전제로 배신감을 호소하는 것은 아닌지.
‘배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