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을 전공한 CEO들은 연구나 개발에는 익숙하지만, 경험이 없다보니 직원들을 규율하고 통솔하는 데에는 많이 어려워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관리, 통솔에 능한 경험자를 임원으로 들이기도 한다. S테크의 김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공학박사 출신인 김 대표는 웬만해서 화를 내지 않는 온화한 성격이다. 그는 직원들과 직접 부딪히는 일보다 혼자 조용히 연구에 몰두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러다보니 CEO로서 직원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거나 직원을 해고해야 할 때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는 회사의 관리를 대신해 줄만한 사람을 오랫동안 찾았다. 지인으로부터 예비역 중령을 소개 받아 상무로 영입했는데, 그가 바로 차 상무. 차 상무는 장교 출신답게 조직원들을 지휘 통솔하는 일에서 만큼은 김 대표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차 상무가 회사에 입사하자 느슨하던 회사 분위기가 급변했다.
김 대표는 직원들의 근태에 불만이 많았다. IT 회사다 보니 야근이 많은 편이라 원래 출근시간이 오전 9시인데도 직원들의 출근시간은 들쑥날쑥 했다. 김 대표는 이를 지적하고 싶었지만 서로 얼굴 붉히는 것이 두려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차 상무는 아침 7시 반에 출근해서는 직원들의 출근시간을 챙겼다. 직원들의 근태가 눈에 띄게 잡혀갔다.
또한 차 상무는 업무를 태만히 하거나 잘못을 저지른 직원에 대해 호되게 질타를 했고, 김 대표가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은 징계제도를 통해 다양한 징계조치를 감행했다. 직원들은 업무상 실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차 상무는 직원들을 엄하게 다루는 한편으로, 직원들과 회식자리를 자주 가지면서 인간적인 유대를 쌓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아 직원들은 차 상무를 무서워하면서도 많이 따랐다.
김 대표는 이제야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아 흐뭇했다. 자신은 강점에 집중하고 자신이 약한 부분을 임원이 보완해 주는 방식. 이것이야 말로 아름다운 협업이 아니겠는가.
차 상무가 S테크에 입시한 지 1년쯤 지날 무렵, 회사에는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었다. 김 대표가 직원들에게 어떤 업무를 지시하면, 직원들은 차 상무의 눈치를 먼저 보았다. 차상무가 그 일에 대해 '진행해도 좋다'고 허락해야 직원들이 움직였다.
차 상무도 조금씩 변해갔다. 김 대표의 지시에 잘 따르던 처음 모습과는 달리 '대표님, 경영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시면 직원들이 반발하게 됩니다.‘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잦아졌다. 김 대표는 자신이 형식상 대표이사에 불과할 뿐 실질적으로는 한 명의 연구원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며칠 전 연봉협상을 할 때 차 상무는 김 대표에게 전년 대비 50% 인상을 요구하면서 '직원들이 대표님에 대해 불만이 많습니다. 심지어 다소간의 동요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잘 막고 있습니다.'는 취지의 말을 하며 은근히 협박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김 대표는 더 이상 이대로 가다가는 회사의 무게중심이 차 상무에게로 넘어갈 수도 있다고 판단해서 차 상무를 합법적으로 해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내게 문의하러 찾아왔던 것이다.
CEO가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임원을 통해 보완하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김 대표는 대체 무엇을 놓쳤던 것일까?
한비자는 그의 저서에서 일관되게 ‘형벌권’과 ‘포상권’은 모두 군주 한 몸에서부터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다.
군주로부터 형벌권과 포상권이 떨어져 나갈 경우 그 권한을 물려받아 휘두르는 권신(權臣)들에게 권한이 집중되고 남용될 위험이 크며, 궁극적으로는 신하와 백성들이 군주보다는 형벌권과 포상권을 행사하는 권신들의 뜻을 더 따르게 되는데, 이렇게 될 경우 결국 군주는 권위를 잃어버리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자리까지 위험해 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전상(田常)은 군주에게 작위와 봉록을 요청하여 벼슬아치들에게 주었다. 그는 백성들에게 곡물을 꿔 줄 때는 큰 말로 퍼주고, 거두어 들일 때는 작은 말로 받아 은혜를 베풀었다. 이렇게 되자 제나라의 군주 간공(簡公)은 덕을 잃고 전상이 그 권한을 잡게 되었으며, 결국 간공은 시해당했다.
자한(子罕)이 송나라의 군주에게 말했다. ‘포상을 받는 것은 백성들이 좋아하는 일이므로 왕께서 직접 하시고 형벌을 받는 것은 백성들이 싫어하는 일이므로 신이 담당하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자 송나라 왕은 형벌의 권한을 잃게 됐고, 자한은 이를 사용해 결국 왕을 협박했다.
전상은 단지 덕을 베푸는 권한만을 사용하고도 간공을 시해할 수 있었고, 자한은 단지 형벌의 권한만을 사용하고도 송나라 왕을 위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신하들 중에는 형과 덕의 권한을 모두 사용하는 자들이 있으니, 지금의 군주는 간공이나 송나라 왕보다 더욱 위태롭다.“
– 이병편 중 -
전상은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풀어서 인심을 얻었고, 간공은 백성들에게 무서운 형벌권을 행사함으로써 두려움과 복종을 이끌어 냈다. 원래 그 은덕과 형벌권의 원천은 군주였지만 그 행사의 주체가 달라지자 백성들은 이를 행사하는 사람을 더 따르거나 겁을 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물론 군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신하가 삼국지의 '제갈량'처럼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아주 깊어, 위임된 권한을 행사하면서 스스로 몸을 낮추어 그 위엄과 공을 군주에게 다 돌린다면 군주의 권위는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부하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권위의 원천이 '자기 자신'인 양 착각하게 된다면 이는 실제 권한이 있는 자의 권한을 빌려와서 그 권한을 마음껏 휘두르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한비자는 다시 소해휼의 이야기를 통해 권한의 위임이 어떤 위험을 초래할 지를 설명한다.
전국시대 중국의 남쪽 초나라에 소해휼(昭奚恤)이라는 재상(宰相)이 있었다. 북방의 나라들은 이 소해휼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초나라의 실권을 그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나라 선왕(宣王)은 북방의 나라들이 왜 소해휼을 두려워하는지 이상하게 여겼다.
어느 날 선왕은 강을(江乙)이라는 신하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자 강을이 대답했다.
"전하,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호랑이가 여우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잡아먹히게 된 여우가 말했습니다. ‘잠깐 기다리게나. 이번에 나는 천제로부터 백수의 왕에 임명되었네. 만일 나를 잡아먹으면 천제의 명령(命令)을 어긴 것이 되어 천벌을 받을 것이야. 내 말이 거짓말이라 생각하거든 나를 따라와 봐. 나를 보면 어떤 놈이라도 두려워서 달아날 테니.'여우의 말을 듣고 호랑이는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과연 만나는 짐승마다 모두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짐승들은 여우 뒤에 있는 호랑이를 보고 달아난 것이지만, 호랑이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북방의 제국이 소해휼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실은 소해휼의 배후에 있는 초나라의 군세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威勢)를 빌어 호기를 부리듯, 남의 세력(勢力)을 빌어 위세(威勢)를 부리는 것을 호가호위(狐假虎威)라고 한다.
S 테크의 경우 차 상무는 호가호위를 통해 자신의 권한을 높여갔고, 결국은 김 대표의 권위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는 차 상무를 주주총회에서 표결로 해임시킬 수는 있지만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는 볼 수 없어 차 상무로부터 손해배상청구를 당할 위험이 있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차 상무에 대한 해임조치를 진행하고 싶어 했다.
결국 김 대표는 주주총회를 통해 차 상무 해임을 결의했고, 차 상무는 자신이 부당하게 해임되었음을 이유로 S테크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김 대표가 각오했던 것. 나는 S테크의 위임을 받아 그 소송에 대응했다. 소송과정에서 차 상무는 ‘회사가 어려울 때 입사해서 회사의 기강을 잡았는데 회사체계가 잡히고 나자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김 대표는 도대체 경영능력이 없는 사람으로서 CEO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면서 김 대표를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재판 과정에서 김 대표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한비자는 말한다.
“호랑이가 능히 개를 굴복시킬 수 있는 까닭은 발톱과 어금니를 가졌기 때문이다. 가령 호랑이가 발톱과 어금니를 버리고 개로 하여금 그것을 쓰게 한다면 호랑이가 도리어 개에게 굴복할 것이다. 군주란 형(형벌)과 덕을 가지고 신하를 제어하는 자이다. 만일 군주가 형과 덕의 권한을 놓아두고 신하로 하여금 그것을 쓰도록 한다면 군주는 도리어 신하에게 제어당할 것이다.”
한바탕 홍역을 치른 김 대표.
독재를 일삼는 군주의 해악도 크지만, 반면에 권신들에 휘둘려서 자신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군주의 해악 또한 작다고 할 수 없다. CEO의 위치에 올랐다면 그에 걸맞는 권한을 행사하면서 조직을 통솔해 가야 할 책임이 있다. 그 권위를 함부로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악역 맡기를 두려워하는 CEO들을 만날 때면 김 대표 사례를 들려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