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우성 변호사 Jan 05. 2016

너 변호사 맞냐?

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누구에게나 초보시절은 있다. 열정은 충만했지만 경륜과 지혜가 부족하던 그 시절.

지나간 시간은 아름답다 말하지만, 의뢰인의 재산, 나아가서는 인생까지 걸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초보 변호사로서의 삶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오롯이 1인분 변호사가 되도록 키워준 혹독한 선배들과 아찔한 경험들.

단잠을 자다 화들짝 깨서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악몽의 재료를 선사하던 그 시절 추억을 떠올려본다.     




사법시험 합격 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군복무(군법무관)를 마치고 부푼 꿈을 안고 로펌에 입사한 것이 1997년 3월.

정상급 로펌에서 변호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뿌듯했다. 누군가가 길에서 “직업이 뭔가요?” 또는 “아, 변호사시군요. 그럼 어느 로펌에서 일하나요?”라고 물어주기 바라던 그 유치찬란한 시절.     



09:00


출근하자마자 비서인 혜민씨가 상쾌한 미소를 띠며 막 내린 커피를 가져다준다.

“변호사님, 오늘 헤어스타일 멋지세요. 호호”

“오, 혜민씨, 굿모닝. 그런데 불안하게도 왜 비행기를 태울까?, 하하”

“오늘 일정표 책상 위에 놓여 있습니다.”


빈틈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은 전장(戰場)에 뛰어드는 용사에게 활력을 준다.      


오전에 회의 하나, 정오에는 P호텔에서 의뢰인과 식사 겸 새로운 사건에 대한 논의, 오후에는 A 회계법인을 방문해서 현재 진행 중인 M&A 협상 진행.     

바쁜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저녁에는 후배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다.


회사 앞 재즈바 가장 좋은 자리로 예약해두었다. 변호사 생활이 어떤지에 대한 생생한 경험담을 들려줘야지. 후배들의 부러워하는 눈빛을 어찌 견딜까나...     






대강 이런 삶이 진행될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상황은...     


“변호사님! 아까 9시쯤 김 변호사님이 찾으셨단 말예요. 아직 출근 전이라 말씀드리기 그래서 잠깐 화장실 갔다고 그랬어요. 얼른 가보세요.”


“헉. 그래요. 혜민씨. 쏘리...”

어제 새벽까지 준비서면 쓰다 새벽에 집에 가서 잠깐 눈 붙이고 나온다는 게 그만  늦잠을 잤다.


혜민씨가 급히 나를 불러 세우더니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내 머리를 가리켰다.


변호사님, 거울 보세요. 새 집....”


거울 속에 비친 내 머리칼이 엉켜 어수선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선배 김 변호사가 아침 댓바람부터 날 찾은 걸보니 결코 바림직한 상황은 아닌 것이 분명한데... 김변호사 방으로 달려갔다.     

노크를 하고 들어서자 나를 은근하게 째려보는 김 변호사.


“휴...빨간펜 선생 심정으로 고쳐주려 해도
어디부터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모르겠다.
너 변호사 맞냐?”


어제 내가 검토를 요청했던 준비서면 출력본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요새 사법연수원에서는 뭘 배우냐?
그리고 맞춤법 책 하나 사줄까?
왜 이렇게 비문(非文)이 많은 거야? 응?”

    

김 변호사 손에서 펄럭이고 있는 준비서면, 저러다가 곧 하늘로 날아오르겠다.


“이런 서면에 우리 로펌이름을 붙여서 내보낸다고?
우리 로펌 이미지는 어쩌고?
조 변호사가 책임질래?”


제가 어떻게 책임을 지겠습니까... 이륙하려던 준비서면을 받아들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선배 박 변호사가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온다.

“조 변호사, 고생 많지? 바빠?”

박 변호사가 웃고 있다. 불안하다.

바쁘다고 솔직히 말해야 하나? 주저하는 사이 박 변호사는 내 어깨에 다정히 손을 올린다.


“영문계약서 검토 건인데, 한번 해볼래?”

영문계약서? 국문계약서라면 몰라도 영문계약서는 아직 해 본 적이 없는데.


“이거 한 건 해보면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아직 경험 없지? 그래서 내가 갖고 왔지. 참고서적들.”

‘영문계약서 검토법’, ‘영문계약서 해제’ 등의 책들을 내 앞에 선물처럼 내려놓았다.


“의뢰인이 내일 오후에 우리가 고쳐준 수정안을 들고 상대방과 협상한다는군. 의뢰인들은 이렇게 항상 여유 없이 던져 준단 말야. 하지만 우린 그걸 해내는거지! 암. 내가 검토해야 할 시간도 필요하니 내일 오전, 아니다. 가능하면 오늘 저녁까지 검토 초안주면 대단히 고맙겠네.”


큰일났네. 준비서면도 빨리 고쳐야 하는데.      


혜민씨의 메모.


'형사팀 최 변호사님이 내일 구속영장실질심사 사건 같이 하고 싶다고 연락 왔습니다.'

바로 인터폰이 울렸다.


우리 로펌 군기반장인 최 변호사님. 찌렁찌렁한 음성이 수화기를 튀어나올 듯 하다.


“어이, 조변호사! 드디어 실력을 발휘할 때가 왔구먼. 이거 IT 관련 사건인데 용어가 너무 낯설어. 내가 알아 봤더니 조변호사가 이쪽을 잘 안다더군. 내일 영장실질심사기일인데 오늘 밤까지 기록검토하고 신문사항을 만들어야 해. 조변호사가 투입되면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지. 하하하!!!”


아.. 내가 왜 입사 때 IT에 관심 많다고 그랬을까.      




선배들이 도저히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시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을 제대로 빨리 수행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능함에 더 속이 상했다. 정말 오기가 생겼다. 내가 이 정도 실력밖에 안되나?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결심을 했다.


‘집에 가지 말자!’


사실 집에서 편히 자고 아침에 일찍 나와서 일을 하면 전체 근무시간은 비슷하다. 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전기(轉機)가 필요하다는 자각이 들어 집에 가지 않고 사무실에서 밤을 새거나 잠을 자면서 ‘사무실과 내가 일심동체가 되자’는 야릇한 결론에 이른 것이다.


월. 화, 목, 금요일을 사무실에서 잤다(당시 나는 주말부부)


모든 변호사가 퇴근한 후 내가 츄리닝 입고 사무실 문 잠그고 나면 왠지 내가 사무실의 주인이 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 나쁘지 않았다.     

밀린 일을 하다 새벽 5시쯤 졸음이 밀려오면 의자 두 개 붙여놓고 거기서 잠을 청했다(그때 왜 간이침대 생각을 못했을꼬. 뒤늦은 후회).

6시쯤 되면 청소 아주머니가 온다. 8시 반쯤 되면 비서들이 출근.

비서들이 출근하기 직전에 일어나 급히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다시 내 방에 들어온다.


‘내가 많이 모자란가?’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좀 더 노력해보자. 그래도 못 따라가면 어쩔 수 없지만.’이라고 마음먹었다.




이런 생활은 1년간 계속됐다.

확실히 사무실에서 밤을 보내니 몸은 피곤했지만 몰입도는 강했다.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느낌이랄까.     


나의 기행(奇行)을 눈치 챈 선배들은 "집에는 가야지. 몸 상한다."라고 걱정했지만, 그 당시 나는 어떻게든 궤도에 오르고 싶었다. 그리고 조직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내가 작성한 서면에 선배들의 ‘빨간펜’ 자취가 현저히 줄어들 무렵 나는 선배들이 나를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주는 느낌을 받았다. 신뢰를 보여주는 선배들의 눈빛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선배들은 그런 방식으로 후배들을 단련시킨 것일까.      


최근 어느 후배변호사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언제쯤이면 저도 온전한 1인분 변호사로서 제대로 역할을 한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아, 나 스스로에게 정말 많이 했던 질문.     


변호사로서 경험이 충분치 않을 때, 정말 가까운 사람이 사건을 맡겨오면 부담스러워 그 사건을 맡지 못한 경험이 여러 번 있다. 변호사라는 타이틀만 갖고 있을 뿐, 그 사람이 나에게 기대하는 만큼의 실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았으니까.      


하지만 5년쯤 지났을까, 그때부터는 가까운 사람의 사건일수록 내가 직접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건 내가 할께.
내가 해서 진다면 다른 변호사가 해도 져.'


그리고 그때쯤이야 어디 가서 '네, 저는 변호사입니다.'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을 수 있었다.     


업무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절대시간’이 필요했는데, 진도가 느렸던 나는 나 만의 방식으로 그 절대시간을 확보하려 발버둥쳤던 것 같다.      


나의 수련장 겸 여관이었던 소공동 신아빌딩 2층 오른쪽 코너에 있던 내 방.

초보 변호사시절 그 방은 내겐 너무나 소중한 추억의 공간으로 기억 속에 잔잔히 남아 있다.     



신아빌딩, 예전 법무법인 태평양이 있던 곳



매거진의 이전글 계약해제 우습게 봤다간 큰 코 다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