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성 변호사의 Law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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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관계를 맺었다 이를 끊어버리는 것을 해제(解除)라고 한다. 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이 계약체결이라면 이를 끊는 방법이 해제통보다.
해제는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을 때 일방적인 통보를 함으로써 그 효력을 발생한다. 그만큼 일방적이고도 강력하다.
먼저 계약한 사람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종결지어야 다음 사람과 계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선 관계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 아주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
김 대리는 회사가 마음에 들었다.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은 아니지만 탄탄한 중소기업이고, 무엇보다 법무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본인 혼자다. 직제상으로는 자기 위로 총무팀장이 있지만 팀장은 법무 업무를 잘 알지 못한다. 회사의 중요 법무 업무(계약서 검토, 통보서 작성, 채권회수 등)의 실질적인 최종 책임자는 김 대리 본인이다. 다소 부담스러운 점도 있지만 최종책임을 지고 일을 처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뿌듯한 일이다.
김 대리 휴대폰에 처음 보는 번호가 떴다.
“김 대리지? 반갑네. 아주 실력 있다고 얘기를 들었네. 나 박 회장이야.”
앗! 회장님.
김 대리가 회사에 입사한 지 5년이 넘었지만 회사 오너인 박 회장을 실제 본 것은 딱 한번. 그것도 먼발치서. 회사 주식 60%를 보유하고 있는 실질적 소유주 박 회장. 회사의 대표이사는 박 회장의 큰 사위다.
김 대리는 박 회장 요청으로 대표이사실 옆에 있는 접견실로 갔다. 박 회장이 김 대리를 반갑게 맞았다.
“회사 일로 바쁠 텐데 내가 개인적인 부탁을 좀 해도 되겠나?”
김 대리는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내가 김포에 땅이 좀 있는데, 이번에 그걸 사려는 사람이 있어서 말야. 나도 더 늙기 전에 적절한 가격에 팔아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물론 공인중개사가 끼어 있긴 한데, 계약서 작성이나 돈을 받는 문제 등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싶었는데, 최 대표가 자네를 추천하더군. 아주 실력이 좋다고 말야.”
역시 대표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있었어.
김 대리는 뿌듯했다, 부동산 매도건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미 사겠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고. 이번에 박 회장 일을 잘 도와주면 회사 내 입지도 더 좋아지리라 기대가 됐다.
김 대리는 박 회장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아 대리인 자격으로 김포 땅을 사려는 윤영복씨를 만났다. 박 회장과 합의한 땅 값은 10억 원.
김 대리는 작성해 둔 계약서 초안을 윤영복씨에게 보여 주었다.
총 매매대금 10억 원
계약금은 계약 당일 1억 원
중도금은 계약 후 1개월 후인 2015. 3. 2.에 6억 원
잔금은 그로부터 1개월 후인 2015. 4. 2.에 3억 원
그 외 계약조항은 일반 부동산 매매계약서와 비슷했다.
윤영복씨는 계약서 내용에 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 날 바로 계약을 체결하고 김 대리는 윤영복씨로부터 계약금 1억 원을 자기앞수표로 받았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윤영복씨는 박 회장 계좌로 6억 원을 입금했다. 이제 잔금만 받으면 거래는 완성된다.
잔금 기일을 1주일 앞둔 2015. 3. 26경, 윤영복씨는 김 대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래요? 제가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고 회장님께 여쭤봐야 합니다. 그럼 며칠까지 가능하시겠어요?”
“한 2주일만 더 늦춰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잔금기일은 2015. 4. 16.로 한다는 거죠? 제가 회장님께 확인해 보고 말씀드리죠.”
박 회장은 김 대리의 보고를 받고는 “뭐, 그 정도 늦어진다는데 이해해 줘야겠지? 그럼 계약서를 다시 써야 하나?”라고 물었다.
“꼭 그럴 필요는 없구요, 단지 간단한 추가 합의서를 쓰면 될 것 같습니다. 즉, ‘당초 계약서상의 잔금일자 2015. 4. 2.을 2015. 4. 16.로 변경한다’는 내용만 넣어서 쓰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박 회장은 별 이의 없이 그렇게 진행하라고 했다. 김 대리는 그 내용으로 추가 합의서를 작성한 뒤 윤영복씨에게 보내 도장을 받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김 대리는 박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박 회장은 다급한 목소리였다.
“김 대리. 약간 다른 상황이 발생했네.”
앗, 무슨 일이지?
“회장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아닐세, 오히려 좋은 일인데 말야.”
박 회장의 땅을 사고 싶은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부동산 개발업자인데, 그 땅을 15억 원에 사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윤영복씨와 계약을 엎어버릴 수는 없는 건가? 내가 받은 계약금 1억 원의 2배인 2억 원을 위약금으로 주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데.”
윤영복씨로부터 계약금만 받은 상황이면 이미 받은 계약금의 두 배를 주고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중도금까지 받은 상황이므로 계약을 박 회장측에서 마음대로 해제할 수는 없었다.
김 대리는 퍼뜩 생각이 떠올랐다.
“회장님, 윤영복씨가 이번 잔금일까지 잔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방법이 생깁니다. 그 때 윤영복씨가 말하는 것을 보니 돈 마련이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이번에도 잔금을 준비하지 못하면, 즉 잔금기일을 어기게 되면 계약 위반이 되므로 지난번처럼 우리가 한 번 더 연기해주지 말고 바로 계약해제통보를 하는 겁니다.
그럼 윤영복씨측 잘못으로 계약이 해제되는 것이므로 이미 받은 계약금 1억 원은 위약금으로 우리가 챙길 수도 있습니다. 계약은 당연히 깨끗이 사라지는 거구요.”
앗. 이런 고마울 데가.
예상 외의 보너스도 받고 회사에서 인정도 받을 수 있고.
이제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자. 윤영복씨가 잔금을 마련하지 못하도록.
윤영복씨는 잔금일 전날인 2015. 4. 15. 김 대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김 대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김 대리님. 아, 이거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제가 잔금을 준비해 보려고 했는데 한 며칠만 더 말미를 주십시오. 곧 돈이 됩니다. 지난번에 돈을 받을 곳에서 기어이 펑크를 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신청했는데, 그게 절차상 며칠 걸린다네요. 잔금기일이 2015. 4. 16.이잖아요. 4.20.정도면 될 것 같은데요.”
오호! 김 대리는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상대방은 눈치 채지 못하게 최대한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구요. 회장님과 협의 후 알려드리겠습니다.”
김 대리는 박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 기쁜 소식을 전달했다.
박 회장도 반가워했다.
“김 대리.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
“오, 깔끔하군. 그러면 그렇게 바로 진행해주게. 김 대리. 자네랑 일을 하니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네.”
다음 날 김 대리는 윤영복씨에게 보낼 계약해제 통보서를 작성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 귀하는 합의한 계약 잔금 일자에 잔금을 지급하지 못했다.
- 따라서 귀하의 계약위반을 이유로 계약서 제9조에 따라 계약을 해제한다.
- 이미 지급받은 계약금은 위약금으로 몰취하고 중도금은 반환할 예정이다.
그리고는 잔금 기일이 지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바로 통보서를 발송했다.
윤영복씨는 그 통보서를 받고 김 대리에게 전화해서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면서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했다. 하지만 김 대리는 ‘저는 그러고 싶은데 박 회장님이 도저히 설득이 안 된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며칠 후 김 대리는 박 회장 땅을 사려는 부동산개발회사 권 사장을 만났다. 아주 야심만만한 젊은 사업가였다. 박 회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요양병원 프로젝트를 전해 들었다.
김 대리는 권 사장과 새로운 부동산계약서를 작성했다.
총 매매대금 15억 원
계약금은 계약 당일 1억 5천만 원
중도금은 계약 후 1개월 후인 2015. 5. 4.에 8억 5천만 원
잔금은 그로부터 1개월 후인 2015. 6. 3.에 5억 원
불과 1달 만에 5억 원이나 더 비싸게 땅을 팔게 됐으니 박 회장은 흡족해했다. 그리고 윤영복씨로부터 위약금 1억 원까지 챙기게 됐으니...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회사의 대표이사는 따로 김 대리를 불러 칭찬했다.
“회장님이 실력 있는 사람 소개했다고 좋아하시던데. 김 대리가 내 체면도 살린 셈이야. 마지막까지 잘 부탁하네.”
김 대리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권 사장이 중도금을 지급한 날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김 대리는 박 회장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처분금지가처분이라고?
처분금지가처분은 그 땅에 권리가 있는 사람이 그 땅을 딴 사람에게 넘기지 말라고 해두는 사전처분인데, 잔금을 준비 못해서 계약을 해제 당한 윤영복씨가 대체 무슨 권리로 처분금지가처분을 해둔다는 거지?
김 대리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당장 법원으로 뛰어가서 처분금지가처분 기록을 복사했다. 윤영복씨의 논리가 무엇인지 알아봐야했다.
새파랗게 질려서 내 앞에 나타난 후배 김 대리.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며 울상이다.
윤영복씨가 잔금을 준비하지 못한 것은 물론 그의 잘못이다. 따라서 박회장으로서는 윤영복씨에게 ‘당신이 계약사항을 못 지켰으니 계약을 해제한다’는 통보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부동산 매매계약은 쌍무계약, 즉 매도인과 매수인 모두 의무를 부담하고 있는 계약이다. ‘매수인(땅을 사는 사람)이 잔금을 지급할 의무’와 ‘매도인(땅을 파는 사람)이 등기이전에 관련된 서류를 넘겨줄 의무’는 동시에 이행되어야 한다(동시이행관계).
따라서 매도인인 박 회장 측에서 계약을 해제하려면 ‘매수인이 잔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매도인은 이미 등기이전에 필요한 서류를 다 구비했고 이를 넘겨줄 준비를 마쳤다(또는 공인중개사에게 다 맡겨놓은 상태다)’리는 표시를 해야 한다. 즉, 나는 내 할 일 다 했는데, 당신은 당신 할 일 다 못했으니 이 계약을 해제한다라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여길 봐봐. 자네가 윤영복씨에게 보낸 계약해제 통보서에는 ‘당신이 잔금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만 표시되어 있잖아? 여기 밑에 ‘매도인(박회장)측은 이미 등기 이전에 필요한 일체의 서류를 다 준비해서 이를 넘겨줄 준비를 하고 있다’는 문장만 썼어도 이 해제는 완전히 효과를 발휘하는 건데...”
계약해제 통보서에서 필요한 한 줄이 빠지는 바람에 계약해제는 효력이 없는 것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박 회장과 윤영복씨의 계약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 된 셈.
마치 A가 부인인 A’와 이혼했다고 생각하고 B를 새부인으로 맞아들여 살고 있는데 그 이혼이 무효라면서 A’가 다시 짐을 챙겨 안방으로 들어온 형국이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윤영복씨는 자신과 계약해야 한다면서 계속 주장했다. 부동산 등기부상의 처분금지가처분이 계속 남아 있었기 때문에 2차 매수인인 권 사장으로서도 난감했다. 권 사장은 금융기관에 이 땅을 보여주고, 자신에게 넘어올 것을 전제로 대출을 받으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물 건너 가버렸다.
결국 권 사장은 박 회장측의 계약 위반을 이유로 계약해제 통보를 했다. 박 회장은 받은 계약금의 두배인 3억 원을 위약금으로 권 사장측에 물어줘야 했다.
그리고 윤영복씨는 은행대출을 통해 준비한 잔금 3억 원을 내고 10억 원에 그 땅을 넘겨받아갔다.
결과적으로 박 회장은 처음과 같이 10억 원에 그 땅을 판 것이다.
김 대리의 회사 생활...
단단히 화가 난 박 회장은 그런 실력 없는 친구가 법무담당자로 있으면 회사 말아먹을 수 있다고 대표이사에게 말했고, 대표이사도 장인어른이자 오너의 등쌀을 이길 수 없었다.
김 대리는 그 회사를 나와서 현재 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