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에 처리했던 사건입니다.
돈을 빌리고도 안갚는 친구때문에 화가 난 A씨가 저를 방문했습니다. 친구 지간이라 가급적 소송을 하기 보다는 일단 경고장(통보서)을 보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제안을 했죠.
의뢰인은 가만히 생각해 보더니 제 제안에 찬성했습니다.
다만 아주 특이한 요청을 하더군요.
"네? 한자로요?"
"예, 바꿀 수 있는 건 전부 한자로 바꿔주입시요."
법적 용어 중에는 한자로 표기할 수 있는 것들이 많긴 한데, 의뢰인 요청은 거의 대부분 글자를 한자로 바꿔 달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이번 문제에 대해서 정해진 날까지 갚지 않으면 법적인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이번 問題에 對해서 定해진 日字까지 辨濟하지 아니할 時에는 그에 相應하는 諸般 法的 措置를 取할 것이니 惠諒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 이유를 물어봤지요.
"그 친구, 학교 다닐 때 공부하고는 담쌓았던 놈입니다. 일단 이거 날라가면 궁금해서라도 읽어봐야 할 텐데, 전부 한자로 되어 있으니 아마 머리 터질 겁니다. 항상 남 앞에서는 똑똑한 척하니 물어보지도 못하고. 이거 읽는것 만으로도 엄청 스트레스 받을 겁니다. "
뭐, 어떻든 의뢰인 요청을 존중하여 통보서 전체 단어의 80% 이상을 한자로 바꿨습니다.
통보서 발송하고 나서 2주쯤 지났나, 의뢰인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 밑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몰래 염탐을 해봤죠. 저도 아는 사람이 있거든요. 통보서 받고나서 옥편 들고 뒤지며 며칠을 괴로워했다더군요. 직원들이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안가르쳐주고 혼자 끙끙 앓다가 나중엔 결국 직원들한테 도움을 요청 하더랍니다. 스타일 구긴거죠. 진짜 통쾌합니다. 변호사님!"
의뢰인은 그 이후 더 이상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돈을 받은 것도 아닌데... 어찌 처리됐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하여튼 아주 독특하게 의뢰인을 만족시켰던 사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