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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n 27. 2016

L'Annonciation(수태고지), 1860

무용지용(無用之用)

L'Annonciation, 1860. Oil on canvas, 170cmⅹ125cm

오르세 그림 일곱번 째 이야기


Eugène-Emmanuel-Amaury-Duval (외젠 엠마뉴엘 아모리 듀발)의

L'Annonciation(수태고지), 1860


중세 성화 풍의 성모 잉태에 대한 그림이 20세기를 40년 앞두고 그려졌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Eugène-Emmanuel-Amaury-Duval(외젠 엠마뉴엘 아모리 듀발 1808~1885)이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이다. 1808년 프랑스 중부 몽루쥬(Montrouge) 태생으로 저 유명한 앵그르로부터 미술을 배웠다. 그림의 분위기가 앵그르의 영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성모영보(聖母領報)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그림은, 성모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잉태하는 장면이다. 누가복음 1장 26∼38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느님의 사자인 천사 가브리엘이 성처녀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회임(懷姙)을 알리는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


듀발은 1833년, 즉 25세 되던 해 파리 전시회를 통해 화단에 데뷔한 뒤 1834년부터 2년 동안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플로렌스 등을 여행하여 예술적 영감을 얻게 된다. 이 그림은 그의 만년의 작품으로서 앵그르의 영향이 그의 예술에 끼친 영향을 첫 눈에 알 수 있다.


성모의 머리 뒤에는 중세의 그림처럼 Halo(광배)까지 그려져 있는 이 그림은, 중세 화가들의 수태고지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중세의 수태고지는 엄숙하고 신비한 상황 중심으로 그림을 묘사하였다면 이 그림에서는 인물 중심, 즉 성모와 천사 가브리엘의 표정과 태도를 중심으로 묘사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모의 자세는 매우 안정적이어서 르네상스 시절의 Sandro Botticelli(보티첼리)가 묘사한 놀라고 있는 성모의 자세(콘트라 포스트 ;비대칭적 자세)와는 다르다. 옷감의 질감은 지나온 로코코의 풍성함을 기억하고 있으며 가브리엘은 고개를 숙임으로 하여 성모의 고결함을 더욱 높이고자 했다. 


직접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야고보의 원(原) 복음서》를 보면, 수태고지는 두 차례 이루어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우물가에서 천사는 모습은 나타내지 않고 말씀만으로 마리아에게 알리고, 다음에는 집에 돌아와 실을 잣는 마리아에게 사람 모습을 한 가브리엘이 나타나 그 말씀이 마리아의 태내(胎內)에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과 비잔틴 미술에서는 우물가의 마리아에 대한 수태고지와 실은 잣는 마리아에 대한 수태고지의 두 가지 형식이 별도로 다루어졌으나, 니케아 공회 이후로 성모의 수태가 무염시태(無染始胎 ; Immaculate conception) 개념으로 전이되면서 새로운 형식이 나타났다. 바로 그림처럼 명상하는 듯한 분위기의 마리아에게 가브리엘이 나타나는 형식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도 탁자 위에 실 꾸러미가 있는 것으로 보아 원전의 이야기를 전혀 배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림처럼 수태고지의 성모 마리아는 대개 서 있는 자세가 많다. 하지만 앉았거나 무릎을 꿇고 있는 그림도 많다. 천사는 보통 가브리엘 한 사람만을 그리고 있으나2∼3명의 천사를 함께 그리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성령의 비둘기를 그리는 경우도 있다. 또 천사는 백합꽃을 들고 있는 때가 많은데, 이 꽃은 순백의 색을 띠고 있으며 꽃 자체로는 암수의 구별이 없기 때문에 마리아의 처녀성의 상징이 된다.




장자 이야기


무용지용(無用之用)


무용지용이란 ‘쓸모 없음의 쓸모’라는 말로서 쓸모의 잣대를 버리고 난 뒤, 그 이상의 쓸모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의 가장 큰 잣대가 유용성, 즉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일 것이다. 그 쓸모는 예로부터 축적된지식과 문화 학문 등이 그 쓸모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런데 2300년전 장자는 그러한 객관적인 기준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그러한 기준에 얽매이다 보니 장자가 살았던  혼돈의 시대(전국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기준을 버려야만 비로소 자유로워 질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무조건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장자는 쓸모의 기준의 변화를 이야기 한다.   


장자적 관점에서 쓸모란 道를 기준으로 하여 알 수 있는 것들일텐데 세상을 모두 이해하고 남음이 있을 정도의 진리나, 그 진리를 깨닫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초월하여 끝 없이 신비로운 경지로의 나아감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경지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고 또는 처음부터 그런 경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그리고 그 쓸모가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쓸모없는 인간’이란 스스로의 존재 가치가 최저점이 되는, 가장 치명적인 상황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쓸모 없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쓸모 없으면 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는 이 쓸모를 버리라고 한다. 


쓸모를 버린다는 것은 ‘오상아(吾喪我)’와 ‘물화(物化)’를 거쳐야만 가능한 경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쉬운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애매한 자유의 경지가 아니라 세상사와 내가 둘이 아니며, 세상이 곧 내가 되고, 내가 곧 세상이 되는 그런 절대 자유의 경지로서 어떠한 부가적인 설명이 어려운 경지다. 이러한 경지는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장자에 의한다면 세상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쓸모라는 고리를 잘라버릴 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장자 제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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