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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n 29. 2016

Le Colisée, vu du Palatin 1870

지극함, 그리고 지극한 경지

Le Colisée, vu du Palatin, 1870. Oil oncanvas, 78cmⅹ126cm

장자, 오르세를 걷다. 오르세 미술관 그림 이야기 여덟 번째 

관념적 풍경화가 Jean-AchilleBenouville(장 아쉴 브누빌)의

Le Colisée, vu du Palatin(팔라티노 언덕에서 보는 콜로세움),1870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지나면서 이탈리아의 독재자들이 콜로세움 곳곳에 박혀있던 쇠붙이를 빼내 그것을 녹여 무기로 쓰는 바람에 콜로세움 외벽은 마치 총이나 포탄을 맞은 것처럼 흉물스러운 외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기 훨씬 이전 브누빌의 그림 속 콜로세움은 아름다운 고대의 건축물로 남아있다.  


그 이유 때문인지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콜로세움은 기대만큼 멋진 유적은 아니다. 다만 로마 시내의 랜드 마크라는 점에서 약간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인데 로마의 융성이 막 시작되었던 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A.D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되었다. 


그곳에서는 글래디에이터(劍鬪士)의 시합과 맹수 연기(猛獸演技) 등이 시행되었으며, 그리스도교 박해 시대에는 신도들을 학살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피지배계층의 관점이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말할 수 없이 잔인하지만 고대 로마의 위정자들에게 이 원형 경기장은 잔혹한 경기를 통해 로마 시민으로서의 일체감을 느끼게 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황제 지배의 위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였을 것이다. 


Jean-Achille Benouville(장 아쉴 브누빌, 1815~1891)은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죽은 풍경 화가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태생인 그가 가장 많이 그린 풍경은 주로 이탈리아의 풍경이었다. 물론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바르비종파의 성지) 숲이나 프랑스 북부의 한적한 산골인 콩피에뉴 풍경도 그의 작품 중에는 많다. 하지만 브누빌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의 풍경이다. 


1837년 로마상에 2등으로 입상한 뒤 세 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그는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Jean-Baptiste Camille Corot(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와 함께 한 이탈리아 여행과 그 이후 5년 동안이나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그린 많은 작품을 파리에서 전시하여 당대 풍경화가로서 이름을 높이게 된다.


현재의 콜로세움은 주위는 깨끗하게 단장되어 관광객들이 포로 로마노의 폐허와 함께 로마를 느끼는 관광 명소가 되었지만 이 그림이 그려질 1870년 당시의 콜로세움은 그림에서 처럼 낮은 언덕과 함께 고대 로마의 신비를 아직은 많이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폐허의 성벽으로 난 작은 관문을 통해 어디론가 가고 있는 사람의 옷차림으로 보아 기독교의 수사 모습인데 흰 머리카락만 보이는 것이 왠지 쓸쓸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풍경을 통해 알 수 있는 브누빌의 예술세계는 객관적 자연으로부터 좀 더 나아가 작가의 관념과 이상이 녹아있는 풍경의 창조에 있다. 그의 이탈리아 풍경 연작에서 대부분 느낄 수 있는 이러한 경향은 고요하고 안정된 풍경을 바탕으로 그 이면에 존재하는 오랜 옛날 어느 한 때,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대부분 퇴락하여 꽤나 달라진 당시의 풍경으로부터 비롯되는 쓸쓸한 느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의 그림에서 읽어 낼 수 있다.     



장자 이야기


지극함, 그리고 지극한 경지


옛사람 중 지혜가 지극한 경지에 이른 이가 있었는데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을까? 처음부터 사물이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이가 있었다. 이는 지극하고 완전한 것이어서 아무것도 보탤 것이 없는 경지이다. 그 다음 경지는 사물은 있으나 구분하지 않는 경지이다. 그 다음은 사물이 구분은 되지만 처음부터 시시비비가 없는 경계이다. 


그러면 지극함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 모호한 의미에 대하여 장자는 옛사람을 인용하여 이야기를 끌어 간다. 이런 방식을 중언(重言)이라 부르는데 장자의 표현방식 중 하나이다. 말(言)의 애매함과 불특정함을 넘어서기 위해 장자는 스스로의 표현방식을 세 종류로 설명하고 있다. 즉, 장자 잡편 우언(寓言)에서 보이는 우언(寓言), 중언(重言), 치언(巵言)에 잘 나타나 있다.


도(道)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에서도 떠나고 침묵에서도 떠나 있다. 도(道)를 말로써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온종일 말하는 것이 모두 다 도(道)이겠지만, 말이나 생각은 언제나 유동적이어서 온종일 말해도 사물의 도(道)는 시시각각으로 달라지게 된다. 도란 사물의 극치여서 말로도 침묵으로도 모두 설명할 수 없다. 모름지기 말을 떠나고 침묵을 떠나야 도(道)의 세계인 것이다. 


언어가 세계를 각각의 개념으로 담아내는 그릇이라면 그 반대쪽에 서 있는 침묵도 역시 그러하다. 이를테면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은, 침묵으로도 설명되기 어렵다. 말과 침묵을 넘어선 경계지점, 이지점에서 우리는 장자가 이야기하는 도(道)를만나게 되는 것이다.


장자 잡편 우언의 첫머리에는 (아마도 장자의 후학이 기술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장자의 이야기 방식인 우언, 중언, 치언에 관한 설명이 보인다. 글 속에서 우언(寓言)은 열 가운데 아홉으로 나타나고, 중언(重言)은 열 가운데 일곱이며, 치언(巵言)은 날마다 생겨나 시비(是非)를 초월한다. 


이 방법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고정화된 언어적 이미지를 격파하기 위해 장자가 사용하는 새로운 서술방식이다. 우언(寓言)은 사람들이 자기 입장과 같으면 따르고, 다르면 반대하며, 자기 생각과 같으면 옳다 하고, 다르면 잘못이라 하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으로 일인칭(我)과 이인칭(彼)을떠나 3 인칭적 태도로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우언(寓言)은 대체로 우화의 형식으로 나타나며 여러 비유와 암시, 은유의 형태를 띤다. 우화는 말의 표면적 의미를 넘어서는 다른 의미가 존재함을 시사한다. 


장자 첫 부분인 소요유의 시작은 대붕의 우화로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런 대붕이 존재하는지, 정말로 거대 물고기 곤이 붕으로부터 유래되었는지 그런 사실 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려 노력해야 한다. 


장자의 우화는 이런 힘을 가진다. 사실성을 벗어나 그 숨겨진 의미를 전달하는 힘이 우언(寓言)에 있는 것이다.


중언(重言)은 시비(是非)를 완화하기 위한 방식으로 장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중요한 인물(공자, 허유, 안회, 요 임금 등)의 권위를 빌려 표현하는 방식이다. 장자 전체에서 공자의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서 상대를 쉽게 설득시킬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 방법을 사용하는 장자의 또 다른 목적은 그 당대 명망가(공자)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기대고 있는 우리의 생각을 비웃거나 혹은 질타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치언(巵言)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특정할 수 없는 말이다. 치(巵)는 술잔을 뜻하는 글자로 치언(巵言)은 술잔이 가득 차면 비우고 텅 비면 다시 가득 차게 하는 것처럼 시기와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하는 말을 뜻한다. 


치언은 글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갖고 나오지는 않지만 달리 보면 글 전체가 치언일 수 있다. 치언은 시비를 초월하고 속박 없는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닐면서 우언과 중언을 아우르는 고차원의 언어 전략이다.


장자 잡편 우언(寓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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