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가치' 수업
오늘은 '지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단원의 마지막 시간이다. ‘사실’과 ‘가치’를 공부하는 날이다. ‘사실과 가치’! 매우 힘든 주제다. 아이들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아직 ‘사실’과 ‘가치’가 구분되어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혼재된 ‘사실’과 ‘가치’를 반드시 구별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해 본다. 하기야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나? 그 과정에서 ‘사실’과 ‘가치’의 구분은 반드시 거쳐야 할 산이다. 고민 끝에 철학 수업에 잘 사용하지 않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사실 중학생들이라 처음부터 모둠을 통한 철학적 토론이나 논의는 하지 않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은 철학적 토론이나 논의를 모둠 별로 할 수 있는 기초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논의를 해 보기 위해 미리 읽기 자료를 나누어 주기도 해 보았으나 그것이 오히려 아이들의 자유로운 사고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것 같아 지난 2학기부터는 미리 자료를 주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철학 시간에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범위를 좁혔다. 이유는 차차 밝히기로 한다.
어쨌거나 ‘사실과 가치’를 공부하기 위해 전과 다른 몇 가지 인쇄물을 만들었다. 사실 이렇게 인쇄물을 통해 공부하면 매우 간단해 보이고 수업의 결과도 좋다. 하지만 아이들을 이 범위로 묶어버리는 부정적인 결과도 함께 나타난다. 철학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이 본래 이 수업의 목표이자 지향점이라면 몇 가지 인쇄물을 통한 수업은 그것에만 몰입하도록 하여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더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모든 철학적 논의는 ‘맞다’, 혹은 ‘틀리다’가 없다. 그것의 판별 기준은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 ‘사실과 가치’는 그렇게 좁은 의미라도 알려야 하겠기에 이런 꼼수를 쓰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런 방식에 잘 적응해 있다. 초등 때부터 이런 방식의 수업은 꽤나 잘 적응해 있는 듯 능숙하게 이야기하고 스티커를 붙인다. 범위를 좁혀주니 나타난 현상이다. 수업을 진행하면서도 내내 갈등이 생긴다. 철학이라는 상황을 이렇게 규격화하고 마침내 디지털처럼 ‘1’과 ‘0’으로 판별하는 아이들의 경향을 심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스스로 이 수업을 시작했을 때 이 수업의 목표는 혼돈과 익숙하지 않음에 대한 탐구, 그리고 내적인 질문과 힘을 발견하는 것이었는데 보통의 지식 전달 수업처럼 한정된 상황 인식으로 만족감을 주는 것이 아닌가? 이런 찜찜함으로 수업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