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중학교 철학수업(34)

'선'과 '악'

by 김준식

'선'과 '악'은 어떻게 구별될까?


1.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은 앞 시간에 배웠던 ‘가치’의 문제와 연결된다. 모든 가치론 논의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이 '선'과 '악'이다. 그런데 이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가치의 문제에서조차 약간의 혼돈을 일으키는 면이 있다. 즉 ‘선’과 ‘악’은 ‘옳다’와 ‘그르다’라는 의미도 내재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과 ‘나쁜’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옳음’ ‘그름’ 그리고 ‘좋음’ ‘나쁨’이 정확하게 구별되지는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대체로 ‘악’보다는 ‘선’에 민감했다. 그리고 그리스에서 말하는 ‘선’은 ‘옳음’이 아니라 ‘좋음’이다. 그리스 민족은 ‘좋음’을 추구하는 민족이고, 그리스인들은 대체적으로 낙천적인 민족이라 ‘악’보다는 ‘선’에 대해 다양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들에게 ‘악’은 다만 이 ‘좋음’의 반대되는 것들 ‘불쾌’ ‘증오’ ‘불신’ 등이었다.


에피쿠로스에게 최고의 선은 ‘쾌락’ 즉 ‘기쁨’이었다. 최고의 ‘선’은 신 또는 그와 가까운 가치들이 아니라 보통의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신'이나 '영혼' 등은 어떤 ‘존재’이지만,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선’, 즉 ‘기쁨’은 어떤 ‘상태’라는 사실이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기쁨’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한순간 일어났다가 곧 사라지는 정념이 아니라 파토스(여러 종류의 감정적 동요)로부터 해방된 ‘ataraxia(평정심)’의 경지를 말한 것이다. 아타락시아는 고요하면서도 기쁨이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기독교가 볼 때 가장 골치 아픈 것이 ‘악’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신은 전능하고 선한 존재인데 왜 세계에 ‘악’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전능한 신(‘선’의 은총으로 만들어진)에 의해 창조된 세계에 왜 ‘악’이 창궐하는가? 기독교의 논리에 따르면 ‘악’이라는 것은 실제로 없다는 것이다. 정말 존재하는 것은 ‘선’ 뿐이고, 다만 ‘선’이 결여(부족함)될 경우 그 결여가 우리에게 ‘악’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악’이란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선’의 결여를 ‘악’으로 본 것이다. 서양의 문화가 기독교 중심으로 넘어가면서 ‘선’과 ‘악’이라는 말의 의미가 매우 무거워지고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선’과 ‘악’은 그리스 문화에서는 다만 ‘좋음’과 ‘나쁨’의 문제였으나 그것이 기독교를 거치면서 ‘옳음’과 ‘그름’의 문제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즉 윤리의 문제에서 도덕의 문제로 바뀌면서 그 내용의 분화는 서양 근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2. 인간은 ‘선’한가? 또는 ‘악’한가?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논란은 역사이래 계속되는 문제이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 중, 맹자는 태어났을 때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은, 순자는 본래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서양의 철학자 로크는 외부의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백지설을 주장했다.


‘선’과 ‘악’의 이중성을 묘사한 문학작품 중에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가 있다. 지위와 명성을 모두 겸비한 의학박사이자 법학박사 지킬. 그는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상태로 파악하여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악’의 부분만을 분리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분리된 ‘악’을 통해 가식과 체면으로 가득한 삶만 중시하여 살아온 자신의 삶에 탈출구를 만들게 된다. 하지만, 한번 ‘악’에 의해 해방감을 맛본 지킬박사는 결국 ‘선’을 버리고(혹은 잃고) 완전한 ‘악’의 화신 하이드가 되고 만다. 이 소설의 핵심은 ‘선’과 ‘악’은 인간은 외적, 내적 영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가 인간 내부의 가치에 따라 ‘선’과 ‘악’이 대립하는 것이라면 외부적인 가치에 따라 ‘선’과 ‘악’이 대립하는 경우는 역사를 통해 너무나 자주 발견할 수 있다.


고려 말, 정몽주와 이방원의 이야기를 해보자. 이방원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조선, 역성혁명)하는 데 정몽주의 지지를 요구하지만 고려에 대한 충심 때문에 이를 거절하자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인다. 이 지점에서는 아직 조선이 건국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원이 ‘악’이고 정몽주가 ‘선’이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되는 순간 이 둘의 위치는 바뀌고 만다. 즉 ‘선’과 ‘악’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그 후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성립되고 나서 정몽주의 이러한 충심(당시에는 ‘악’이었던)이 새로운 국가에 필요한 규범(충신, 충성)이 되자 정몽주의 권위를 복권시키게 된다. 즉 정몽주를 忠(왕조 국가에서는 절대 ‘선’이 되는 덕목)의 이미지로 변화시킨 것이다. 이를테면 동일한 신념과 행동이 가치 기준에 따라 때로는 ‘악’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선’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 학교 뒤편 숲. 자연은 선과 악의 구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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