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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Nov 27. 2016

L'eglise d'Auvers....,1890.

고통으로부터의 영감

L'eglise d'Auvers-sur-Oise, vue du chevet,1890. Oil on canvas 94  74.5


국가의 위기는 개인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장자, 오르세를 걷다"를 한 동안 연재하지 못한 이유는 현재의 국가적 위기에서 혼자 '미술'이니 '장자'니 하는 閑談을 말할 수 없음이었다. 이리 저리 집회 현장을 뛰어다녀 시간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편으로는 그래도 뭔가 유지되어야 하는 것들이 있어야 하기에 다시 연재를 이어 나가기로 한다. 



고통으로부터의 영감, 고흐의 오베르 교회의 풍경


37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정확히 자살 인지도 알 수 없는 여전히 동기가 모호한 죽음)로 생을 마감한 이 사람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그는 정신병으로 20대 후반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을 괴롭히고 타인을 괴롭혔지만 그가 남긴 1000여 점의 회화는 그의 불편한 삶을 넘어 우리에게는 위대한 현실로 다가온다.


Vincent Willem van Gogh는 네덜란드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우울하고 신중한 성격이었던 그는 청소년기에 기독교에 감화되어 목사가 되고자 했지만 그의 광적이고 자기중심적 성격 탓에 전도사조차 되어보지 못한 채 20대 초반에 미술품 중계상에 취직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가 만약 목사가 되었다면 19세기 서양 예술사의 한 모퉁이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고흐가 오베르에 정착한 것은 1890년 5월경이었다. 생 레미 병원을 나와 오베르 수 아즈(Auvers-sur-Oise)에 온 여러 이유 가운데에는 자신의 주치의였던 가세 박사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던 이유도 있었다. 고흐가 실제 오베르 언덕에 있는 교회를 그린 이 그림은 고흐의 젊은 시절 자신의 고향에 대한 추억이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1885년 자신이 화가로 살아갈 것을 결심했던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Nuenen(누에넨) 시기에 그린 De hut(The Cottage – 오두막집)가 이 그림의 바닥에 깔려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흐 스스로 이런 이야기를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도 기술하였고 또, 그림의 구성이 비슷해 보인다. 오베르로 옮긴 이후 고흐는 오베르의 풍경, 특히 집들과 주변 풍경을 묘사한 연작을 그리는데, 이것은 아마도 오베르에 대한 고흐의 인상은 매우 강렬했음을 알 수 있다. 


고흐의 그림에 등장하는 오베르 교회의 모습은 오늘날 실제 교회와 거의 비슷하다. 고흐의 그림 속에 있는 오베르 교회는 고흐 특유의 선, 즉 구불구불하여 더욱 강렬한 교회의 지붕과 벽체를 연결하는 선이 묘사되어 있고 임파스토 기법으로 지나치게 푸른빛을 강조한 하늘이 어우러져 있다. 이 푸른색은 같은 해 고흐가 그린 Portrait of Adeline Ravoux(아들린 라부의 초상)의 배경이 되는 푸른빛과 같은 계열로서 “simple deep blue(단순하고 깊은 푸른색)”으로 불린다. 교회 전면에서 햇살이 비치고 있지만 교회는 이 빛에 대한 짙은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동시에 강렬한 반사도 없이 다만 환하게 묘사되어있다. 물론 회백색의 기둥, 건물의 벽체의 이음선, 스테인드 글라스의 테두리가 다른 부분에 비해 밝지만 강렬한 반사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미 정신적으로 광적인 상태와 정상의 상태를 구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고흐가 거의 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그린이 교회 풍경은 그가 한 때 성직자의 길을 걸으려 했던 것과 약간의 연관이 있을 수 있다. 젊은 시절 그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통해 교회의 빛과 어둠에 대하여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는데 그의 마음속에 있는 교회와 실제의 교회가 그림 속에 혼재되어, 실체로서 그리고 관념으로서의 빛과 어둠에 대한 고흐의 생각을 우리는이 그림을 통해 어렵지 않게 읽어 낼 수 있다. 


1890년 7월 고흐는 오베르의 풍광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그린 대표작인 이 그림 외에도 오베르의 풍광을 그린 “Undergrowth with Two Figures”, “Daubigny's Garden”,” Tree Roots”등이 있다. 이러한 열정을 불태우던 고흐는 같은 해 7월 27일 Lefaucheux(르포쉐) 리볼버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쏜다.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총을 쏜 지약 하루 반나절 뒤 그는 37살의 짧은 삶을 마감한다. 그 가죽은 곳은 그의 그림에도 등장하는 밀밭이었다.





장자 이야기


죽음에 대한 태도


장자 대종사에 등장하는 인물 들은 대부분 가공의 인물들이 많다. 장자가 사용하는 극단적인 비유를 하려면 아무래도 실존 인물들은 부담이 갈 수밖에 없으므로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켰을 것이다.


그중 子桑戶(자상호), 孟子反(맹자반) 子琴張(자금장)은 공자의 여러 제자들 중 안회, 증자, 자로를 비유하였는데 특별히 이런 비유를 하게 된 것은 이 세 사람을 등장시켜 유교에서 말하는 禮의 본질에 대해 장자적인 비판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 세 명 중 자상호가 죽자 맹자반과 자금장은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누에(蠶) 올릴 채반을 엮거나 금(琴)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행동을 하였다. 죽은 자상호의 조문을 위해 거기에 와 있다가 이 광경을 본 공자의 제자 자공은 아연실색하면서 그런 행동이 예에 맞는 것인가 하고 두 사람에게 묻는다. 


그랬더니 두 사람(맹자반과 자금장)은 한 술 더 떠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二人相視而笑曰(이인상시이소왈) :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是惡知禮矣(시악지례의) : 어찌 예의 뜻을 알리오.(자공 너는 진실로 예의의 뜻을 모른다는 약간은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장자는 사실 공자의 예법에 넌더리를 낸 인물로 보인다. 이유는 확실치 않지만 장자라는 책 전편에 공자의 예법을 무용한 것이라고 강조, 또 강조하는 대목이 여러 번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공자의 예법이야 말로 당시의 혼란스러움(전국시대)을 가져온 원인 중의 하나라고 보았던 모양이다.


자공은 씩씩 거리며 공자에게 가서 이런 일을 다 일러 받친다. 그런데 웬걸! 공자는 그들은 이미 삶과 죽음을 넘어선 존재들이니 그들이 하는 행동은 인간의 예법으로 재단할 일이 아니라고 제자에게 말한다.(사실 이 말은 장자의 말인데 책 속에는 공자가 하는 말로 되어 있으니 장자의 꼼수도 대단하다. 공자를 두 번 죽이는 장자의 꼼수다.)


자공이 못내 아쉬워하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가 하고 볼멘소리로 공자에게 물었더니 어라!! 천하에 위대한 스승인 공자는 역으로 이렇게 자조 섞인 말을 하며 고개를 떨군다. 


丘天之戮民也(구천지륙민야) : 나는(공자 자신) 하늘에 죄를 지은 사람이다. 즉, 하늘에 죄를 지은 것처럼 아직 세상의 이것저것에 엮여, 자유롭지 못하니 그 경지를 알기는 하되, 그 경지에 이를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공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天之小人(천지소인) : 하늘의 입장에서의 소인이 

人之君子(인지군자) : 사람의 세계에서 군자이고 

天之君子(천지군자) : 하늘의 군자는 

人之小人也(인지소인야) : 사람의 세계에서 소인이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이라는 매우 주관적인 개념을 끌고 와 이야기를 얼버무리는데 이 또한 장자의 꼼수다. 즉, 공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장자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방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등장하는 인물 모두는 사실 가상인물이다. 공자도 자공도 나머지 세 사람도. 특히 공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의 그 공자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장자는 이런 방법적 회의를 통해 그가 추구하는 초월적 진리에 다가가고자 했던 것이다.


장자 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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