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得已
1848년 파리에서 출생한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정치부 신문기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혁명기의 혼란을 피해 남미 페루의 수도인 리마로 이주해서 신문사를 차리기로 계획하고 가족을 데리고 페루로 이주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페루로 가는 여객선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폴 고갱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페루 리마에서 불행하게 시작되었다. 이러한 페루의 삶은 고갱에게 일생 동안 잊히지 않는 불행한 기억으로 남아 그의 일생을 지배하게 된다.
고갱의 가족은 1854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오를레앙에 정착하게 된다. 1865년 17세 되던 해 고갱은 선박의 항로를 담당하는 수습 도선사(사관후보생)가 되어 상선(商船)을 타고 라틴아메리카와 북극 등 지구촌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 이때의 경험으로부터 그의 삶과 예술 전체를 관통하는 이국적 느낌이 형성되게 된다. 1871년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증권 중개인의 직업을 갖게 된다. 그리고 약 11년 동안 그 일을 유지하면서 성공한 비즈니스맨으로 살았다. 1879년 그의 연봉은 무려 30,000프랑이었는데 지금으로 환산하면 1억 3천만 원 정도의 고액을 증권 중개인으로 벌어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1882년 파리의 금융시장이 붕괴되면서 고갱은 이 일을 그만두게 되고 동시에 거의 파산상태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는 고갱을 전업 화가로 전향시키는 계기가 된다.
1873년 그가 25세되던 해부터 그는 증권 중개인의 일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의 직장이 있던 파리 금융가 주위로 작은 카페에는 당시 인상파 화가들이 자주 출입하였고 거기서 전시회와 그림 판매가 이루어졌는데 젊은 고갱은 이곳에서 그의 예술적 스승이었던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를 만나게 된다. 1879년 고갱이 그린 “The Market Gardens ofVaugirard(보지라르의 시장 정원)”은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 화가였던 피사로의 느낌이 느껴진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결혼 생활을 하던 고갱은 1885년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그 해 그린 이 그림, Nature morte a la mandolin(만도린이 있는 정물)은 아직은 완숙기에 접어들지 못했던 고갱의 그림으로서 인상주의 회화가 가지는 사물에 주관적 묘사와 사물에 닿아 반사되는 빛을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약간은 어눌한 느낌과 둔탁함이 있다. 특히 바닥에 놓여있는 만도린의 짙은 색상이 그림의 무겁게 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이후 고갱이 완숙기로 접어들면서 오히려 고갱 특유의 채색방법으로 자리잡기도 한다. 정물(靜物– still life , nature morte)에 대한 표현은 일본풍의 영향과 함께 이후 고갱의 회화적 표현 방법인 구획 주의(Cloisonnism)의 희미한 그림자가 느껴지기도 한다.
1887년 파나마를 방문한 이후 3년 동안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적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그 결실을 파리에서 전시하게 되고 이 그림들을 고흐(Vincentvan Gogh) 가 보게 되면서 고흐와의 9주 동안의 동거의 계기가 된다. 물론 고갱이 떠남으로써 이 동거는 끝나버리지만 고흐에게는 매우 큰 상실감을 주게 된다. 1890년 고갱은 처음으로 타이티를 방문하는데 타이티는 그의 삶에 새로운 안식처와 동시에 예술적 영감의 장소가 된다. 그 후 고갱은 여러 번 타이티와 파리를 오갔고 마침내 영원히 타히티 섬으로 돌아갈 것으로 결심하였고 1895년 6월 말 프랑스를 떠나 남태평양으로 향했다. 그가 파리에 있던 시절 열렸던 전시회에서 전시된 작품들은 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훗날 피카소 등 젊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득이’란 무엇일까? 得은 얻음이다. 已는 이미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 已는 “그치다” 또는 “그만두다”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얻지 못하여 그만두다, 혹은 얻을 수 없으니 그친 상태를 ‘부득이’로 볼 수 있다. 우리 국어사전에는 ‘마지 못하여 하는수 없이’로 풀이하는데 크게 확장시켜 보면 크게 다른 뜻은 아니다. 하지만 세밀하게 보자면 話者의 의지의 강도나 방향은 사뭇 다른 느낌이 있다.
‘제물론’에 따르면 “통함은 얻음이다.”(通也者, 得也)고 했다. 얻음(得)은 통하였을 때를 말한다면 “부득이(不得已)” 즉 얻지 못하여 그만두었으니 통하지 못하는, 좀 더 정확하게는 통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통이 능사는 아니다. 통은도(道)가 아니라 다만 能일 뿐이다. 동시에 통은 필연적으로 더 많은 통이 필요해지기 때문에 심재(心齋)를 방해하여 편견을 가질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장자 생존 당시, 전국시대의 통할 수 없는 현실을 장자는 스스로 ‘부득이’ 함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살아 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땅 위를 걸어야 하고(생존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행동), 또 남에게 부림을 받는 처지일 수밖에 없다. 인간사는 어떻게든 남을 부리든 또 남에게 부림을 당하든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관계의 공간은 여러 갈래로 나뉘는데 먼저 인륜(人倫), 그리고 예(禮)와 의(義)로 분화한다. 거기서 다시 분별(分別)이 생기니 주(主)와 변(邊)이 드러나게 되고, 이것은 다시 경(競)과 쟁(爭)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마침내 도(道)와는 한 없이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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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분열되고 복잡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과연 안전하고 평안해질 수 있는가? 장자가 살던 그 시대는 사나운 군주의 백성으로서 자칫 마음을 비우지 않는 것은 곧 죽음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시대였다. 또, 세월이 2300년이나 흐른 지금의 현실은 어떤가? 우리가 사는 공간은 더욱 세밀하게 분열되고 관계는 더 복잡하게 얽혀서 ‘부득이’는 갈수록 많아지는 현실이다.
하지만 장자는 의외의 해결책을 내놓는다. 장자 잡편 처음 庚桑楚篇(경상초편)에 이르기를
有爲也欲當(유위야욕당) : 그의 행동이 합당하게 되고 싶으면,
則緣於不得已(즉연어부득이) : 자연에 따라 ‘부득이’하게 행동해야 한다.
不得已之類(부득이지류) : (자연에 따라) ‘부득이’와 비슷하게 행동하는 것이
聖人之道(성인지도) : (오히려) 성인의 도이다.
뭔가? ‘부득이’ 해 지라는 이야기인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부득이’의 뜻을 ‘얻지 못하니 그만둔다’로새겨 보면 장자의 이 말이 조금은 이해되기도 한다. 즉, 얻으려 애쓰는 것이 오히려 모든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함의가 있다. 하지만 무조건 불완전하게 내 버려둔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무리하게 얻으려 함으로 나와 타인의 삶에 커다란 위해를 줄 우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로서 장자 나름대로 궁구 해낸 자유를 나타낸 말이다.
“부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