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로가 본 초 겨울의 풍경
미국 출신의 미술사학자인 존 르왈드(John Rewald 1912~1994)가 1963년에 발표한 카미유 피사로 전기에서 르왈드는 피사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피사로를 “dean of the Impressionist painters” 즉, “인상주의 화가들의 어른”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그 이유로 피사로의 따뜻하고 인자한 성품과 화가로서의 실력, 그리고 지적인 풍모가 균형을 이룬 점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카미유 피사로(Jacob Abraham Camille Pissarro,1830~1903)는 지금의 미국령 버진 아일랜드(당시에는 덴마크령) 성 토마스에서 태어나 12세 되던 해 프랑스의 기숙학교인 Savary Academy로 진학한다. 여기서 피사로는 드로잉과 회화의 기초를 배우게 된다. 17세에 다시 고향인 성 토마스로 돌아온 피사로는 약 5년 동안 아버지의 상점 점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그림 공부를 하게 된다. 1855년 그가 25세 되던 해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덴마크 출신의 풍경화가 Anton Melbye의 조수 겸 제자가 된다. 이 시기에 젊은 피사로에게 미적 영감을 준 화가는 쿠르베를 비롯해서 도비니, 밀레, 그리고 코로 등이었는데 코로는 피사로에게 직접 교육을 통해 자신의 미적 영감을 전수한다.
겨울날 작은 마을의 붉은 지붕과 언덕을 묘사한 이 그림은 피사로가 늦은 나이에 결혼(1870년, 41세) 후 잠시 살았던 파리 근교의 퐁투아즈의 풍경이다. 파리 근교 퐁투아즈 지방의 생 드니 언덕에 모여 있는 붉은 지붕들과 그 뒤편 붉은 황토 언덕을 앙상한 나뭇가지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인상주의 회화의 특징 중 하나는 대상물의 실제 모습과 더불어 화가가 그 대상물을 통한 내적인 반응이 잘 표현되는 것이다. 즉, 대상물이 화가의 미적 경험과 내부적인 삶의 철학으로 가공되어 캔버스에 옮겨지기 때문에 화가의 내적인 성향은 인상주의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피사로가 이 그림을 그리던 시절 피사로의 표현 대상은 주로 산과 들판, 그리고 계곡과 나무가 주종을 이루는데 이러한 그의 화풍은 모네와 르누아르, 세잔 그리고 바지유와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스며든 자연에 대한 애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사로의 풍경화에 대해 당시 대중들은 신통치 못한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에밀 졸라 등 당시의 평론가들에게만 극찬을 받았다. 어쩌면 퐁텐블로 숲의 풍경화와는 약간 달라진 피사로의 그림에 아직은 대중들이 적응하지 못해서 생긴 일일지도 모른다. 피사로는 30세 되던 해(1860년) 주류화가들의 데뷔 무대인 살롱 전에 전시되었고 1863년에는 비 주류화가들의 데뷔 무대인 낙선전에도 참여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피사로는 주류와 비주류를 망라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피사로는 세잔과 고갱의 스승으로도 매우 유명한데 특히 젊은 세잔은 피사로에게 교육받기 위하여 먼 길을 걷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피사로를 존경하였고 동시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고갱 또한 스스로 피사로의 제자였음을 밝혔을 정도로 피사로의 회화에 대한 영향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피사로는 만년에 안질로 뚜렷한 사물의 분간이 어렵게 되자 거리를 조망할 수 있는 3~4층의 호텔 베란다에서 거리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는데 안질 탓이기는 하지만 이 시기의 회화는 오히려 색채의 혼합이 환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겨울 햇살이 비추는 생 드니의 언덕배기에 보이는 땅과 지붕 모두 붉은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과수원의 잎들은 다 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으며 간혹 잎을 떨구지 못한 잎들이 듬성듬성 나무에 매달려 있다. 특별히 그림의 제목에 붉은 지붕(Toits rouges - Red roofs)이라는 것을 표시한 것으로 보아 아직은 젊은 피사로의 눈에 비친 초 겨울 햇살의 인상과 그 햇살에 반사된 붉은색 지붕, 그리고 토양의 색채가 매우 강렬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초 겨울의 쓸쓸한 느낌은 거의 없다. 이 그림은 훗날 세잔의 여러 풍경화에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장자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이는 혜시이다. 그는 언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근본적 설명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혜시는 확정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뒤집으려고 노력 했다.
그는 우리가 사물에 부여해 버린 절대적 속성(일반 특성의 시간적, 공간적 속성 또는 분류적 속성)을 다양한 변증법적 방법을 통해 부정하였다. 혜시는 高低 大小같은 속성이 무한 공간에서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언어가 고정된 진위 판단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또 그런 방법론적 오류에 오염되지 않았다면, 더불어 선입관이나 사물의 상대적 구별을 절대화하는 도구를 쓰이지 않는다면, 세계에 대해 우리의 경험에서 얻는 것을 언어는 정확하게 설명해 줄 것이다.
언어는 도덕적으로나 지적인 의미로나 절대적 시비의 관점을 표시할 수는 없다. 언어의 근거가 되는 특정존재(有)의 근거는 모두 無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장자의 꿈과 나비의 꿈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 그림자이다. 어떤 개념도 어떤 묘사도 실체로부터 완벽하게 고립되거나 고정된 완벽한 자체의 “자기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장자 사상에서 은유는 매우 중요하다. 장자는 사물의 독특한 무늬, 다양성, 고유성에 대해 논할 때, 다양한 은유적 방법을 동원했다. 그 은유의 반대쪽에서 언제나 장자를 견제하는 혜시가 있다.
[i] 혜시(기원전 370년?-기원전 310년?)는중국 전국 시대의 정치가, 사상가. 송나라 사람으로 위나라의재상이 됨. 제자백가 중 명가(名家)의 대표적 인물.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명제 제시. 《장자》의 잡편 〈天下〉편에 혜자의명제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