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미술에 대해 이야기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민을 하다가 세잔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추상미술의 시작 폴 세잔(1)
19세기 중반경에 이르러 유럽인들은 산업혁명의 결과로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겪는 것은 물론이고 미술, 문화, 사상 측면에서도 기존의 가치관과 크게 다른 변화를 갖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계급사회가 무너지고 신흥 부유층이 대두되고 그들이 집안 장식 혹은 지적 교양의 과시용으로 작품을 구입하게 됨에 따라 미술의 주제도 문학적이고 종교적인 주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인상주의자(Impressionist)로 불리는 화가들은 이젤을 들고 야외로 나가 자연을 새로운 회화 탐구의 주제로 삼게 되었다. 인상주의자들은 자연을 충실하게 재현하기 위해 노력과 열정을 기울이기보다는 시각적 경험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들은 빛과 대기에 의해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을 화폭에 담았다. 그것은 인간이 바라보는 시각 세계가 무엇인지 찾기 위해서였다.
서양 회화는 조토(Giotto di Bondone, 1267~1337)이래 수백 년 동안 명암대비법(明暗對比法)으로 사물의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자연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고려되어 오백여 년 동안 계승되어 왔다.
그러나 1830년경 마차를 타고 외출을 하던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에 의해 우연히 명암대비법에 대한 허상이 깨어졌다. 들라크루아는 자신이 타고 가던 노란 마차가 숲 그늘 속에 들어갈 때 마차 그림자의 색이 검정이 아니라 짙은 보라라는 것을 발견한다. 즉 그림자와 그늘이 검정 혹은 짙은 갈색이 아니라 사물마다 독특한 색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 사물의 그림자는 그 사물이 갖고 있는 색채의 보색이라는 이러한 발견은 회화에서 색채의 순수성을 발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들라크루아의 초기 실험단계를 거쳐 인상주의자들은 명암대비법 대신에 냉온대비법(冷溫對比法)을 이용하여 자연이 갖고 있는 색채의 순수성을 화폭에 담았다. 예를 들어 냉온대비법은 붉은색의 사물을 묘사할 때 어두운 그늘 부분과 그림자를 보색인 초록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표현된 화면은 빛으로 가득 찬 자연색채의 순수성을 갖게 되고 동시에 화가의 관념 속에 구성된 특정의 이미지를 색채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밝고 어두운 명암에 의한 입체감이 사라짐에 따라 화면은 평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인상주의 이후부터 회화는 캔버스의 형태, 물감의 성질 등의 여러 가지 제반 조건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오히려 이것들을 회화의 특징으로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다.
모더니즘 회화의 특징은 화면 자체의 물질적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모더니스트 화가들은 아무리 자연을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노력해도 회화는 결국 평평한 표면 위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을 자각하였다. 즉 회화가 자연을 재현(Representation)함으로써 자연의 하부적 위치하는 것을 반대하고 그러한 재현에서 벗어나 회화 자체로서의 독립적인 존재라는 자각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재현은 더 이상 회화의 목적과 가치가 될 수 없다는 이러한 인식은 후기 인상주의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사진기의 발명이 이러한 분위기를 증폭시키는 계기가 된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시각의 한계에서 벗어난 자연의 본질적인 법칙과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무엇보다도 회화가 자연을 재현하는 기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혼신의 힘을 다해 탐구한 사람은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이다. 세잔에 의하면 화면은, 구조적인 질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문학적 혹은 종교적인 회화 주제를 과감하게 버리고 객관적으로 화면의 구조를 분석하기에 용이한 정물을 선택하여 선, 색채, 질감 등 회화가 갖는 물질적인 속성을 분석하면서, 오히려 회화의 제약 조건이었던 캔버스와 물감, 붓 등의 재료가 가지는 실체적 의미에 주목하였다.
세잔은 화면의 견고한 구조를 위하여 고전의 확고함과 엄격함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고전주의 회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고전주의 회화에서 금과옥조였던 원근법을 과감하게 제거하였다. 그는 자신의 회화에 다시점(多視點)의 시각을 도입하여 화면 전체를 질서 있게 분할, 구성하면서 회화의 평면성을 인정하고 또 실현하였다. 그는 자연과 대등한 조화를 가진 미술의 법칙을 만들어 회화를 거의 추상적으로 재구성하는 데까지 접근한다. 따라서 세잔은 추상회화의 진정한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