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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시집 ‘外物’ 서문을 쓰다.

by 김준식

1. 한시의 風格


국립국어원에서 정한 詩의 뜻은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감흥이란 또 무엇인가? 감흥이란 "마음속 깊이 감동받아 일어나는 흥취"라고 되어 있는데 '흥'과 '취미'가 합해진 흥취를 느끼는 것이 감흥이라고 했다.


따라서 결국 詩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재미나 즐거움(대상의 유무와 관계없이)을 律, 즉 정해진 방식대로 압축해서 옮겨 놓은 글을 말하는데 아무나 詩를 쓰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흥은 누구나 느끼지만 그 흥을 법칙에 맞춰 글로 옮기는 것은 대단한 훈련과 지식, 그리고 창의력이 동반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자문화권에서 오래전부터 있어온 漢詩는 그 법칙이 매우 엄격하여 함부로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인간의 '흥'과 '취'를 넘는 내면의 풍경과 심지어 득도의 경지까지도 담아내고 있어서 누구나 쉽게 다가설 수 없는 매우 높은 경지의 것들이었다.


이렇듯 漢詩는 그 옛날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 아시아 한자 문화권에 있었던 지식인들이 자신의 흥취를 알 수 있음과 동시에 그 사회의 여러 풍경을 감지할 수 있는 단순한 풍경 묘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 시절 교양과 문화를 상징하는 꽃이었다.


그런가 하면 漢詩(이하 詩)는 그 시대 출세의 유일한 길이었고(과거의 중요한 과목 중 하나가 詩다.) 그 사람의 지식의 깊이와 미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 방법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제가는 말은 쉽게 이해가 된다.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채운 것은 모두 詩다.”


사람들이 우주와 인간, 그리고 사회의 여러 가지 풍경들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 곧 詩로서 표현하는 것이었으므로 박제가의 말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유로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 詩는 다른 예술의 많은 동기를 제공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사례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즉 漢詩를 통해 품은 풍경을 그림으로 묘사하고 또 그 묘사된 그림 위에 詩적 정서를 더함으로써 미학적으로 완성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시적인 풍경의 묘사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고 또 분류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저작이 사공도의 '24 시품'이다. 사공도는 중국 당나라 말기 사람이다. 시인으로서 명성도 드높았지만 그가 지은 '24시 품'은 당시까지 전해져 오는 시에 대한 해석과 논점을 그의 방식대로 분류한 특별한 詩作이자 후대에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한시의 標石이 될 만한 것이었다.


그 특징은 '24시 품'의 모든 묘사가 회화적이고 의미가 풍부하며 독자의 연상과 상상을 계발해서 구체적 형상을 넘어서 우리 모두를 광활한 예술적 공간으로 인도하고 있다.


'24시 품'이란 시의 '意境'을 24품으로 나누어 각 품을 12구 48자의 운문으로 묘사하여 詩로서 詩를 드러내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意境'이란 작자의 주관적인 사상과 감정이 객관적인 사물이나 대상을 만나 융합하면서 생성되는 의미 또는 형상을 말함이다. '24시 품'은 시 속에 나타난 이러한 의미와 형상을 24개의 풍으로 묘사하고 있다. ‘風格’이란 '물질적 혹은 정신적 창조물에서 보이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중 스무 번째 風格인 ‘形容’은 다음과 같다.


絶佇靈索 (절저영색) 정신을 모아 마음을 다하여 구상하면

小回淸眞 (소회청진) 잠시 뒤 맑고 참다운 것이 나타나리니

如寬水影 (여관수영) 물에 비친 그림자를 부드럽게 묘사하듯,

如寫陽春 (여사양춘) 따뜻한 봄 볕처럼 그려 내도록 해야 한다.


2. 나의 한시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선친께서 국민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나이의 나에게 한문 교육을 시킨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고맙고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0대는 한문을 공부했다는 기억조차 꺼내지 못할 만큼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문이 눈에 들어왔는데 어린 시절의 기억에 스스로 놀라워하며 공부를 새롭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엉터리 한시를 짓게 되었는데 2006년경에는 한 해에 다섯 수 정도를 지었던 것을 기억한다. 韻譜를 보고 외우는 동시에 사물의 의경에 다가가서 시적 흥취를 가져오기란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었다. 한 달이 지나도 20자(5언 절구 1수)를 맞춰 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15년이 지난 지금도 사실은 머리를 쥐어짜서 겨우 겨우 시를 짓는다. 다만 지난 세월의 훈련 덕에 기간이 단축되었을 뿐이다.


2021년이 끝나면 과연 몇 편의 시가 쌓일지 모르겠다. 나의 시를 보는 누군가는 이것은 시가 아니라고, 이것은 그냥 20자, 28자를 이리저리 맞춘 것뿐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글은 내 일상의 치열한 기록이며 내 주변의 모든 사물에 대한 敬意이며 獻詞이다. 하여 『장자』의 외물에 다가간다. 즉, 나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상황은 어떠할 것이라고 미리 확신할 수 없음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또 세상의 모든 일은 반드시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에 구속되어서는 내면의 진지함을 잃어버리기 쉽고 더불어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2021년 4월 30일 김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