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이겨야 하는 긴 싸움의 과정에서
파블로 카잘스 버전으로 이 음악을 듣는다.(미샤 마이스키 버전으로 들은 20년 전과 비교해서 이 글을 쓴다.) 첼로 현을 왕복하는 활의 섬유 한 가닥 한 가닥과 그 음률의 변화가 육화 되어 심장과 폐부에 강렬한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음악은 한 없이 부드럽고 유려하다. 전주곡을 넘어서면 알라망드(춤곡) 다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첼로가 가진 악기의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듯)조용하고 동시에 음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카잘스는 보우잉을 천천히 함으로써 연주시간이 조금 길고 마이스키는 그 부분을 줄여서 연주시간이 조금 짧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카잘스의 깊이를 더 좋아한다. 그렇다고 마이스키 버전이 경망스럽다거나 또는 지나치게 짧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호흡의 문제처럼 기계적으로 느낄 수 없는 순간과 순간의 문제다.
유려한 보우잉으로 시작되는 2번의 서주는 애절함을 더하게 하거나 심연으로 빠져들게 하지만 결코 그런 추락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장치를 곳곳에 만들어 놓은 Bach. 두 현을 동시에 연주하여 격정을 보이다가도 이내 간결하게 이어지는 음률의 변화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 이리라. 눈이라도 내리는 날 듣는 2번 전주는 내리는 눈만큼 경이롭다. 알라망드에 이르러서는 슬픔의 불협화음에 집중한다. 어쩌면 슬픔의 본질에 대한 Bach의 생각은 불협화음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놀랍게도 불협화음조차도 아름답다. 빠르고 느린 반복으로 때론 침잠하다가 때론 가벼움으로 이어지는 오르내림은 현악기가 가지는 자유로움인지도 모르겠다.
정점에서 최저점으로, 다시 최저점에서 정점으로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첼로 현을 따라 우리의 삶은 이어진다. 1번의 주제를 약간 반복하는 것은 음악의 일관성, Bach 시대 음악의 의무이었을 것이고 뒤 따라 나오는 불협화음들은 시대와의 불화가 아니었을까?
빠르지 않게 이어지는 첼로 음은 협곡을 건너고 때로 평원을 지나 다시 가파른 고갯길에서 느끼는 가쁜 호흡까지 여행자의 행보를 닮았다. 본질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 삶의 여행은, 사라반드에서 좌절을, 부레에서는 다시 희망을 이야기한다.
저음의 절망을 느껴보라. 절망은 절망을 부른다. 절망은 라르고 혹은 아다지오처럼 느리고 부드럽다. 하지만 절망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이다. 희망의 끝은 새싹처럼 여리기 때문에 시간을 필요로 한다. 다시 이어지는 몇 개의 좌절이 끝난 뒤 이제 제법 푸르게 자란 희망의 푸른 잎사귀에 몸을 맡긴다. 디미누엔도 되는 소리의 뒤에 무성한 희망의 잎들을 본다. 다시 정형화된 사라반드가 이어지고 지그로 정돈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절망의 늪에서 희망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전체 음악 중에서 가장 철학적이고 난해한 부분이다. "je pense, donc je suis(Cogito ergo Sum)!!"으로 일컬어지는 데카르트 의지처럼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근세의 바탕 위에 신과 인간, 그리고 음악과 가치의 세계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연결되거나 혹은 경계를 가진다.
아름다운 것은 그 이후의 문제지만 아름다움은 역으로 그 모든 것을 승화시켜 버린다. 승화된 아름다움은 다시 서양, 그들의 신에게로 봉헌된다. 이 모든 것이 나와 음악 사이에 놓여 있다. 나는 음악을 듣고 이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고, 이 모든 것은 음악을 통하여 나에게로 스며든다.
파르티타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서주부터 전체를 아우르는 음악적 기교를 본다. 장엄하고 부드러운, 혹은 예리하고 둔탁한, 때로는 정교하거나 때로는 혼란스러운 모든 부분이 나열되었다가 동시에 뭉쳐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