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에 의한 콜라주가 색채를 화면 속에서 객체화시키는 실험의 길을 열었다면, 19세기 초의 색채 과학 이론은 미술에 또 다른 하나의 길을 제공하였다. 색채에 대한 19세기의 과학적 접근은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의 많은 화가를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추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20세기 초, 이른바 전 세계적으로 몰아닥친 발명과 발견의 풍토는 미술가들에게 사물에서 해방된 색채를 탐구할 수 있는 기틀을 제공하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작품들은 대개 프리즘으로 분해된 빛으로 가득 차 있는데 형태에 집중한 큐비즘보다는 신인상주의의 분할주의 기법에서 훨씬 더 영향을 받는다. 물론 신인상주의의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와 같은 화가들이 색채이론을 원용하였으나 그들의 작업은 여전히 사물에 반영된 빛의 해석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의 많은 미술가들은 색채를 객체로부터 독립시켜 새로운 추상에 접근하기 위해 그들의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 무렵, 작품을 통해 색채 추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바로 프랑스의 오르피즘 화가인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 1885-1941)였다. 1905년과 1907년 사이에 들로네는 인상주의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준 바 있는 Michel Eugène Chevreul(1786-1889)의 논문 De la loi du contraste simultané des couleurs et de l'assortiment des objets colorés「색채의 동시대비 법칙에 관하여」(1839)를 연구하였다.
슈브뢸의 색채이론은 앞서 발표된 괴테의 색채론(Zur Farbenlehre, 1810)에 영향을 받은 바, 프리즘으로 분해한 보색(補色)을 시각적으로 분석하여, 나란히 배열된 색채가 인접한 색을 강조하거나 혹은 위치에 따라 매우 다른 효과를 발생시킨다고 결론지었다.(예를 들어, 어두운 청색은 인접한 노란색을 초록색에 가깝게 만드는 반면, 밝은 청색은 똑같은 노란색을 주황색에 가깝게 만드는 효과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괴테는 색채의 물리적인 속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반(反) 뉴턴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중요할 뿐 아니라, 색채의 ‘도덕적인 효과’(즉 색채의 형이상학적 혹은 암시적인 잠재성)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괴테는 색채를 더하거나 감소시키는 도표와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색채 감각을 나타내는 표를 만들었다.(저 유명한 색환)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가 the Morning after the Deluge(1843)라는 그림을 통해 괴테의 색채 이론을 탐구한 바 있으나, 추상이라는 이름으로 제작하기 위해 그러한 색채 이론을 끌어들인 것은 아니다.
미국의 물리학자 오그덴 루드(Ogden Nicholas Rood)는 'Text-book of Color; Or, Modern Chromatics, with Applications to Art and Industry'(1881)에서, 야외에서 빛에 영향을 받은 색채의 개개 구성 성분을 밝힘으로써 이러한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어쨌거나 슈브뢸과 루드의 색채이론과 큐비즘에 모두 해박했던 들로네는 기술적으로는 색채와 색채 대비에 의존하지만 결국 ‘동시적’ 지각으로 발전된 회화 유형을 만들고자 하였다. 들로네는 슈브뢸의 용어(‘색채의 동시대비 법칙’)를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여러 과학자의 이론을 확장시켜, 추상미술에서 색채가 형태뿐 아니라 움직임의 환영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됨을 시사하였다.
파리에 살고 있던 두 미국 미술가 스탠턴 맥도널드-라이트(Stanton Macdonald-Wright, 1890-1973)와 모건 러셀(Morgan Russell, 1886-1953)은 신인상주의자와 들로네가 영향을 받았던 과학적 색채이론에 근거를 두고 들로네보다 먼저 동시 주의(Synchronism)라는 색채이론을 발전시켰다. ‘동시 주의’라는 명칭은 ‘색채와 더불어 동시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그리고 그 리듬과 음악성에 있어서 ‘교향곡’과의 유사성을 의미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다. 러셀은 루벤스와 미켈란젤로 같은 화가들이 형태에 부여했던 격렬한 뒤틀림과 소용돌이를 색채에 부여하고자 노력하고 또 열망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근거로 색채 추상의 창시자가 쿠프카(František Kupka, 체코 출신의 화가이자 그래픽 아티스트)나 들로네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프카의 원반이나 들로네의 색채 진동이 없었다면, 맥도널드-라이트의 ‘개념 동시성’과 같은 그림이 출현할 수 있었을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몇몇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도 들로네처럼 색채를 재현의 기능에서 해방시키는 데 관심을 가지고, 도움이 될 만한 색채 이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 1883-1966)는 파리와 밀라노 사이를 오가며 활발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분할주의 이론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1906년에는 이것을 주제로 프레비아티(Gaetano Previati)가 'I principi scientifici del Divisionismo'(분할주의의 과학적 이론, 1910)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세베리니가 파리에서 신인상주의자 폴 시냐크를 만나 분할주의에 대한 자신의 지식(‘합리적인 방법에 따라 분할되고 균형을 이루며 시각적으로 혼합된, 오로지 순수한 색조를 사용한 회화’를 포함한다)을 직접적인 예를 통해 피력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한편 뮌헨에 있던 러시아인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도 색채 탐구에 집중하였는데 역시 그에게 영향을 준 것도 과학적 색채 이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