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Ästhetik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식 Dec 08. 2021

의지의 객관화인 표상

* 화가 엄경근의 개인전 그림을 미리 리뷰하는 글입니다. 개인전은 2022년 1월 진주시 소재 진주문고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화가의 사전 허락아래 작품의 리뷰를 올립니다. 

달동네 - 소년에게 2021 Oil on canvas

1. 달동네 - 소년에게 2021 


달이 떠 있다. 그믐으로 가는 달이다. 갈수록 어둠은 짙어질 것이고 가로등 불 빛이 밝아질 것이다. 달동네 꼭대기로 가는 계단에서 아버지와 만났다. 나는 아버지에게 안겼다. 나를 품에 안은 아버지의 등과 작은 내 머리 위로 가로등 불빛과 달 빛이 함께 쏟아진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그려지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심지어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사진도 차이가 많다. 하물며 화가의 의지로 해석되는 세상은 당연히 비 현실적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비현실성이 증가할수록 그림을 보는 우리는 그림 속으로 더 걸어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그림을 그린 화가와 그림을 보는 사람이 조우하게 된다. 이 그림은 바로 그 순간이다.


‘소년에게’라는 표제를 붙인 것으로 미루어 저 그림 속의 사람은 화가가 소년이었던 시절, 화가의 아버지와 화가 자신일지도 모른다. 화가의 어린 시절이나 나의 어린 시절이나 우리의 아버지들은 우리를 살갑게 안아 줄 수 없었다. 어쩌면 스스로 안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최면을 걸며 그 엄혹한 시절을 살아 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모습을 객체화 또는 타자화한 이 그림 속에, 화가의 의지가 그림 곳곳에 녹아 있다. 화가 스스로 그렇게 보고 싶다는 마음과 그렇게 보였다는 생각이 밀물과 썰물처럼 교차한다. 둥글게 휜 전봇대는 화가 스스로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간 흔적이다. 장면 속에서 바라보는 그림 밖 풍경과 장면 속 풍경이 묘하게 겹쳐져 있다. 


집들은 불을 노랗게 밝혔고, 지붕과 하늘은 검게 내려앉았다. 화면 속은 한 없이 고요하다. 소년의 숨소리와 아버지의 숨소리가 겨우 들린다. 그 지극히 정밀한 순간을 화가는 바로 지금,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달동네 - 낮달 2021, Oil on canvas

2. 달동네 - 낮달 2021


화가가 배운 그림은 서양의 그림이 분명하다. 재료나 그림을 그리는 방법,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도구까지 서양에서 전래된 것들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서양의 방식으로 표현한 동양(편의상 부르는 이름이다. 동양이니 서양이니 하는 표현이 사실은 일제의 잔재다. 하지만 이미 많이 굳어져서 적절한 용어가 없다.)의 정서다. 


화면에서 공백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은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서다. 그냥 비워두는 것이다. 그 공백은 그림을 보는 사람의 공간이다. 거기에 뭘 넣고 빼고는 그림을 그린 화가와는 무관하다. 극단적으로 중국 원나라 시절 요자연(饒自然1312~1365)은 그의 화론에서 12忌(기)를 이야기하면서 가장 먼저 피해야 할 것으로 포치박밀(布置拍密, 즉 구도가 지나치게 빽빽한 것)이라고 했다. 즉, 화면을 지나치게 채우는 것을 경계했다. 이것은 중국의 모든 회화에서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우리의 모든 회화에서 거의 법칙처럼 준수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그림이나 중국 그림에는 공간이 많다. 대부분은 강과 안개, 그리고 바다와 구름, 그리고 알 수 없는 영혼의 공간을 그렇게 상징화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화면의 왼쪽 위에 있는 풍경과 달이지만 구름 혹은 안개로 보이는 공백이야말로 이 그림의 핵심이자 주제일 수 있다. 화가가 비록 서양식 미술 교육을 받았고 서양의 도구와 재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지만(하는 수 없이 캔버스를 비울 수 없어 구름이나 안개로 묘사했지만) 그의 DNA 속에는 한국인, 그리고 동양의 정서가 흐르고 있다. 그 깊은 내면의 정서가 화가로 하여금 이런 공백을 창조하였을 것이다. 


그림을 보는 우리는 분홍의 꽃(아마도 벚꽃일 가능성이 크다.) 나무가 바람 따라 몸을 숙이고 있고 달은 여전히 계단이 있는 건물들을 비추는 풍경을 본다. 하지만 구름이나 안개로 묘사된 공간이 있으므로 해서 이 그림 속 달동네는 仙境처럼 몽환적인 풍경이 된다. 피곤한 일상이 지속되는 삶의 공간이 잠시나마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꿈꾸는 공간으로 되는 마법은 분명 저 공백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혁명의 전조(?), 붉은말의 목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