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근 화백 작품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
겨우 책을 다 읽었다. 엄경근은 화가인데 글을 너무 잘 쓴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달동네로 오르는 그의 호흡이 있다. 어떤 문장에서도 나는 목이 메었다. 그 어렵다는 칸트도 쇼펜하우어도 하이데거도 단 숨에 읽어 치우는 내가 이 작은 책을 다 읽는데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울고 또 울었다. 그림을 보다가 한 시간을 넘기고 책을 덮고 다시 울다가 또 책을 펴고 다시 그림을 보았다.
인용할 부분이 너무 많아 인용을 포기한다. 책을 사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엄경근 화백의 글이다.
1. 須彌山(수미산)
수미산이라는 산이 있다. 불교의 세계관에 나오는 상상의 산이다. 세상은 아홉 산과 여덟 바다가 겹쳐져 있는데 그중 가장 높은 산이 바로 수미산이다. 세계의 중앙에 있는 이 거대한 산의 중턱에는 사천왕이 살고, 산 꼭대기에는 帝釋天(제석천)이 사는 곳(비비상천)이 있다. 해와 달은 수미산의 허리를 돈다. 여덟 바다 중 가장 바깥쪽 바다의 사방에 섬(四洲, 사주)이 있는데, 그 중 남쪽에 있는 섬, 즉 남염부제(南閻浮提 – 다른 말, 남섬부주)에 인간이 살고 있다고 하며, 그곳이 바로 지구라는 말이다.
이상과 같은 전설적인 면 이외에 실제로 히말라야 북쪽, 티베트의 라싸 서쪽 ‘阿里(아리)’라는 지역은 ‘신의 영역’으로 일컬어지는 전인미답의 오지 중의 오지이다. 거기에 해발 6,714m의 미개척 봉우리 카일라스(Kailas) 산이 있다. 이 산으로부터 종교적 이미지로 형상화된 것이 수미산이다.
카일라스 산은 피라미드의 형상으로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덮여 있다. 순례자들에게 이 산은 곧 ‘우주의 중심’이고, 신앙의 중심지인 것이다. 삼라만상을 순환하게 하는 으뜸 산이요, 세계의 기둥으로 숭앙된다.
엄경근의 그림에서 우리는 늘 신비로운 수미산과 마주하고 있다. 허공에 떠 있는 둥근 달동네가 아니라 우주의 근원인 수미산이, 검거나 푸른 혹은 보랏빛 태허공에 떠 있는 모습으로 그의 그림 속에 있다. 때론 집 하나만 있다가, 또 때로는 두어 채의 집들이 옹기종기 있기도 하고, 또 더러는 계단 주위로 많은 집들이 있는 신비로운 수미산이 엄경근의 화면 속에 있다.
꼭대기에 제석천이 사는 것처럼 달동네 마을 끝 자락에 화가가 살았으니 화가는 제석천처럼 아래를 굽어보았을 것이다.
2. 달동네 – 꽃마을 2010
사계절 내내 변화하는 달동네를 엄경근은 아름답게 묘사했지만 나에겐 모두 너무 슬픈 모습이다. 꽃동네 마을이라 꽃이 환하다. 꽃으로 수놓은 작은 수미산이다. 그림에서 꽃을 그리는 것은 몇 가지 경우가 있다. 먼저 실제로 그리려는 대상물을 장식하는 꽃이 있다. 무슨 꽃이라도 좋다. 계절에 관계도 없이 대상물을 환하게 해 주면 된다. 두 번째 꽃은 꽃 자체가 대상물이다. 이 경우도 대지에 뿌리를 박고 살아있는 그대로의 꽃을 묘사하는 것이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경우는 그 꽃을 잘라 일정한 장소에서 재 배열하여 그림을 그리는 경우로 나뉜다. 후자를 특별히 우리는 정물화(Still life)라고 부른다.
세 번째 경우가 엄경근 화백이 그린 이 그림의 꽃이다. 꽃은 꽃으로 충분히 환하게 피어서 제목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단지 제목을 설명하거나 환하게 빛나는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꽃은 아니다. 이 꽃은 그림을 그린 화가의 심상이 객체화된 것이다. 꽃동네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화가는 그 동네를 꽃으로 장식하고 싶어진 것이다. 실제로 이 동네에 꽃이 있을 리 만무하다. 삶의 공간도 좁은 곳에 꽃 심을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화가 스스로 꽃을 심고 가꿔서 활짝 피워냈다. 그 환한 꽃밭을 화면에 옮겨 놓았으니 이 꽃은 생명 있는 그 어떤 꽃보다 더 아름답고 생생하다.
수미산 주위에 푸른 어둠이 있다. 수미산 허리쯤을 도는 달도 잠시 꽃을 본다. 희미하게 불을 켠 동네로 향하는 마을버스는 순례자처럼 느리고 힘들어 보인다. 꽃 밭 사이로 난 검은 길을 따라 가로등이 있지만 꽃이 저리 환하니 가로등을 켤 이유가 없다. 화가의 말처럼 검은색은 수많은 색들의 조합이다. 달이 잠시 멈춘 환한 꽃 동네에 하늘빛은 오늘 밤, 유독 푸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