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harsis [1], 슬픔으로부터의 정화(바움가르텐 미학을 넘어)
논리성에 기초하지 않아도 될 자유가 충분히 보장된 것 중 하나가 예술이다. 오히려 비 논리적인 것에서 사람들은 미적 감흥을 더 느끼게 된다. 예술을 창조하는 사람들과 그 반대편에서 창조된 예술을 관람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놓인 이 비논리의 벽은, 해석의 다양성이라는 장치를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귀납적으로 다시 예술의 본질에 다가서도록 한다.
엄경근 화백의 책(달동네 오디세이아)에 실린 화가의 작품을 오래 보면서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두 번째 이야기(https://brunch.co.kr/@brunchfzpe/1183)에서 언급했던 수미산의 모티브처럼 화가가 그의 작품들을 통해 마침내 나타내고자 하는 대상물의 이미지가 대단히 비 논리적이기는 하지만 나의 머릿속에도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일종의 이미지의 轉移(전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비가 많이 오는 날 골목길, 가로등이 켜져 있어 빗줄기가 선명하게 보이고 바닥에는 빗물이 고여있고 빗줄기에 빗물이 튀어 오른다. 그 좁은 공간 사이에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고 누군가 연주를 하고 있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지만 우리는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모든 사실에 공감해버리고 만다.
독일 미학의 선구자인 바움가르텐은 미적 진리를 규정하는 기준으로는 “첫째, 미는 모순율에 저촉되면 아니 되며 둘째, 미에는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는 충족 이유율이 있어야 하고 셋째, 미에는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라는 것들이 제시되고 있다.(먼로 C, 비어슬리 저, 이성훈·안원현 역, 미학사, 학술총서 4, 이론과 실천 1997)
바움가르텐이 이야기하는 美의 기준을 충족하는 어떤 조건도 이 그림에는 찾을 수 없다. 이 그림은 역설과 모순투성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림에 공감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이 그림에는 아름다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분명히 아름다움도 있다.) 하지만 아름다움만큼 중요한 것은 그림에 내재된 파토스[2]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그림처럼, 그림을 통해 작가가 나타내려고 하는 사실에 대한 관람자의 분명한 공감, 그리하여 이 그림을 보는 순간 관람자는 그림 속으로 작가와 함께 걸어 들어가 비를 맞고 서서 피아노 연주를 듣거나 혹은 다만 비를 맞는 것이다.
이 특별한 풍경을 창조해 낸 작가의 힘은 상상력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상상력은 인식의 표층에 머물러 얇고 가벼우며 금세 사라져 버리는 꿈 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서양의 현대 미술에서 느끼는 감정은 아마도 이런 류의 상상력 인지도 모른다.(물론 모두 가볍지는 않다.)
우리가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작가에게 공감하는 것은 작가의 삶을 너무나 명징하게 드러낸 역설에 있다. 지독한 역설의 그림, 우리가 가지고 있는 피아노, 그것도 그랜드 피아노에 대한 이미지와 달동네와 비, 그리고 가로등 불빛의 이미지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이미지다. 그 극단의 이미지를 한 화면 속에 배치하고 거기에 누군가를 앉혀 연주를 하게 하는 작가의 상상력이 그저 가벼운 표층의 인식일 수 있겠는가?
결코 크지 않은 10호짜리 캔버스를 보고 우리가 느끼는 것은, 화면 속 깊이깊이 내려앉은 작가의 슬픔과 어둠 속에 켜켜이 쌓아 둔 작가의 아픔을 그림을 보는 순간 너무나 절절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화된 마음을 본다.
[1]대부분의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쾌감이나 희열, 전율 정도로 생각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카타르시스는 비극에서 비참한 모습이 해소된 이후의 정화된 심상을 표현하는 말이다.
[2]파토스(pathos)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 용어로써 청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을 나타낸다. 오늘날에는 예술 장르에서 사용하는 의사소통 기교 혹은 도구로서 ‘은유’나 ‘이야기’ 그리고 작품으로부터 전달되는 작가의 총체적인 열정, 그리고 작품 전체에서 나타나는 감정과 작가와 관람자의 공감 등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