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zma Petrov-Vodkin(쿠즈마 페트로프-보드킨, 1878-1939) 1878년 카스피해 북쪽 흐발린스크(카스피해의 오래전 이름이기도 하다.)에서 구두 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였던 그는 이콘화가들로부터 약간의 레슨을 받기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보드킨은 州都인 Samara의 철도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8세 되던 해(1896) Art Classes of Fedor Burov(페도르 뷰로프 예술학교)에 입학한다.
예술학교 재학 중 어머니의 소개로 Saint Petersburg(한 때 레닌그라드로 불렸던 도시)에서 그림을 공부하였는데 이 시기에 그가 만난 사람 중에 저 유명한 몽환적 상징주의 화가 Victor Borisov-Musatov(보리소프 무사 토프 - https://brunch.co.kr/@brunchfzpe/1082 ) 도 있었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Stieglitz Academy(스티글리츠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뒤 20세가 되던 해 꿈에 그리던 Moscow School of Painting, Sculpture and Architecture(모스크바 예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서 보드킨은 이미 러시아적 초상화 작가로 명성을 얻은 Valentin Serov(발렌틴 세로프)와 러시아 인상주의의 기수 Konstantin Korovin(콘스탄틴 코로빈)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다. 1901년에는 드디어 러시아를 떠나 유럽을 여행하던 중 뮌헨에서 사실주의 화가이자 슬로베인(범 슬라브 인)화가들의 위대한 스승 Anton Ažbe(안톤 아즈베)를 만나 사사하게 된다.
보드킨의 초기 작품은 러시아 정교회와 대척점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을 대변한다. 이를테면 그의 초기 작품들은 에로틱한 장면이 많은데 그 원인으로 러시아 정교회의 그림자를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1910년에 발표한 ‘Sleep(Dream)’은 이런 경향의 대표적 그림이다. 이 그림에 대한 Alexandre Benois(알렉산드 브누아 - 지지하는 쪽)와 Ilya Repin(일리야 레핀 – 반대하는 쪽)의 논쟁이 유명하다.
그가 그린 또 다른 유명한 작품이 바로 붉은말이 인상적인 1912년에 발표한 ‘Bathing of a Red Horse(목욕하는 붉은말)’이었다. 이 작품은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보드킨의 견해였을 터인데 1905년 피의 일요일을 겪으면서 보드킨을 비롯한 러시아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에 대한 견해가 요동치는 시기였다. 차르에 대한 불신과 혁명에의 기대가 뒤섞인 혼란의 시대에 붉은색 말과 나체의 소년이 주는 강렬한 느낌은 예술은 곧 세상의 표정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이 붉은색과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과는 거의 무관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보드킨의 예술은 늘 Blasphemy(신성모독)과 에로틱의 세계와 경계에 서 있었는데 아마도 어린 시절 압도적 교회 분위기에 대한 가벼운 저항이었을 것이다. 1924년부터 26년까지 보드킨은 프랑스에 있으면서 초상화 작업에 몰두한다. 소련의 위대한 여류 시인 Anna Akhmatova(안나 아흐마토바)의 초상화가 이 시기의 작품이다.
1928년 소련으로 돌아온 보드킨은 공산주의 혁명에 동의하였고 1932년 Leningrad Union of Artists(레닌그라드 예술가 조합)의 초대 회장이 된다. 1939년 결핵으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