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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an 09. 2022

엄경근 그림 이야기를 또 쓰다.


1.     기준



1 gram의 정의는 ‘섭씨 4 °C의 순수한 물이 1 세제곱 센티미터의 정육면체를 가득 채울 수 있는 무게’로 되어있다. 그러면 1㎝는 1m의 100분 1인데 1m의 정의는 꽤 까다롭다. 1983년 마지막으로 정해진 1m의 정의는 ‘진공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참고로 빛은 1초에 299,792,458m를 나아간다.)



우리가 흔히 쓰는 온도 섭씨, 그리고 화씨 길이를 나타내는 야드와 피트, 그리고 무게를 나타내는 온스, 파운드 등은 모두 제 각기 그 원인과 생성된 문화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그 기준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한다. 역사상 수많은 나라들이 이 기준을 통일하려 했고, 지금은 국제적으로 하나의 기준을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KS가 있다.  



늘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이 기준이다. ‘공정’은 ‘공평’과 ‘정의’의 합성어인데 ‘공평’은 비교적 기준을 정할 수 있는 말이지만 ‘정의’는 그 기준이 모호함을 넘어 기준을 정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공정’을 떠 벌리는 정치꾼들이란! 


2.     아! 엄경근



세상에서 위의 기준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다. 아니 따르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할 수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것은 바로 예술이다. 예술에서 기준을 세우는 것 자체가 벌써 비예술적이다. 기준이 있으면 이미 예술이 아니다. 기준이 없어야 아름답고, 기준이 없어야 향기로우며, 기준이 없어야 무한해질 수 있다.



이즈음 나는 ‘엄경근’이라는 화가에게 거의 몰입되어 있다. 심지어 그가 캔버스에 그린 세계가 꿈에 보인 적도 있다. 요 며칠 나는 그의 그림에서 사공도의 24시 품의 여러 경지를 떠 올린다. 분명 서양화의 형식을 한 엄경근의 ‘그림’인데 나는 거기서 동양의 ‘시적’ 의경을 느끼니 참 부조화 같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가장 먼저 엄경근의 그림에서 느끼는 시적 의경은 ‘含蓄(함축)’이다. 함축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엄경근의 대부분 그림은 지극히 고요하고 정밀한 풍경이다. 어떤 소리도 그의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지만 우리는 이상하게도 달동네 불빛에서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숨소리조차 들을 수 있다. 적당한 광량이 더해지는 전시실에서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다음은 ‘縝密(진밀)’이다. 즉 ‘치밀한 구성과 맥락’이다. 엄경근은 매우 복잡한 얼개를 그의 그림 속에 넣어두고 있어서 관람자인 우리가 그림 속에서 한 올씩 끄집어낼 때마다 서리서리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렇게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도록 화가는 그림 곳곳에 그 단서를 숨겨 놓고 우리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찾아내기만 하면 우리는 그가 하려던 이야기를 아낌없이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도 그림 속에서 그의 이야기와 교차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委曲(위곡)’이다. 엄경근의 그림 속에는 수많은 ‘파란과 곡절’이 있다. 평온함은 파란과 곡절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림 속에 있는 나비, 배, 그믐달, 아스라한 불 빛, 짙푸른 하늘, 수미산처럼 떠 있는 달동네, 희미한 불빛의 뒤뚱거리는 버스, 휘어진 전봇대, 분홍의 벚꽃, 회전목마, 사다리, 어른이 된 어린 왕자…. 그 모든 것은 파란과 곡절의 상징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평온함을 볼 수 있다. 처음부터 평온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悲慨(비개)’ 또한 그의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의경이다. 즉, 비극적 파토스의 미학이다. 비 오는 날 골목길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비개’의 절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처럼(Aristotle's Tragic Plot Structure, Poetics. 천병희 역, 2019 문예출판사) “비극의 마지막은 카타르시스”인데 엄경근의 그림은 화가 스스로 비극의 모든 과정을 거친 뒤 담담하게 풀어놓은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관람자인 우리는 다만 그 카타르시스를 통해 그의 비극을 추측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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