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서사시 ‘루크리스의 능욕(The Rape of Lucrece)’ 이야기다.
고대 로마에서 있었던 일이다. 신분이 미천했지만(노예의 아들) 선왕의 두 왕자를 제치고 로마의 6대 왕이 된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는 말년에 그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두 딸은 한 아버지의 자식이라고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성향이 판이하게 달랐다.
한 명은 너무 착한 반면, 다른 한 명은 너무도 사악했다. 그는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준 선왕의 두 아들에게 이 둘을 결혼시키는데, 공교롭게도 그들 역시 하나는 너무 착한 반면, 하나는 너무 사악했다. 두 딸의 운명에 균형을 이루기 위해 툴리우스는 착한 딸은 사악한 왕자에게, 사악한 딸은 착한 왕자에게 결혼을 시켰다. 하지만 사악한 두 명은 착한 두 명을 죽이고 그들끼리 다시 결혼했다. 인간의 운명이란!
타르퀴니우스(Tarquinius)라는 이름의 그 사악한 왕자는 하루라도 빨리 왕이 되고 싶어서 자신의 장인이자 현재의 왕인 툴리우스를 죽이기로 한다.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 왕에게 찾아가서 자신이 왕임을 선언하지만 왕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그를 옥좌에서 끌어낸 다음 계단 아래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친다. 하지만 단 번에 죽지 않자 타르퀴니우스는 부하들을 시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를 난자하여 죽이고 마침내 왕이 되었다.
친정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기다리던 그의 사악한 부인 툴리아(Tullia)는 집에서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달려가는데, 왕궁 근처의 좁은 길에 이르렀을 때 마부가 갑자기 마차를 세웠다. 남편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친정아버지의 시신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에 눈이 멀고 사악하기가 악마와도 같은 툴리아는 마부에게 시신 위로 그대로 마차를 몰 것을 명령한다. 오로지 왕비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 어떤 일에도 개의치 않고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처참하게 죽이고 왕이 된 남편에게 축하인사를 했다.
이처럼 사악한 사람들이 행복할 리는 없다. 만족은 순간에 불과하고 여생은 후회와 가책만 있을 뿐이다. 악마나 다름없던 타르퀴니우스도 말년엔 심한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했다. 그는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다. 그는 예전에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몹시 후회했다.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땐 욕망 밖에는 몰랐지만, 세월이 흐르니 잔인하게 빼앗은 것은 엄청난 대가를 요구했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빨리 죽거나 누군가가 그를 몰아내 주기만을 바랐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타르퀴니우스 왕은 어느 날 이웃 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자신의 왕자들을 데리고 출정한다. 전쟁 중에 휘하 장수들 사이에서 누구의 아내가 가장 정숙한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그들은 급기야 밤중에 말을 달려 로마로 돌아가서 아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를 확인한다. 다른 부인들은 흥청망청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콜라티누스(Collatinus)라는 장수의 아내 루크레티아(Lucretia)만은 하인들과 함께 늦은 밤까지 옷감을 짜며 정숙하게 가정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자태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악한 왕의 역시 사악한 왕자 중 하나인 섹스투스(Sextus) 타르퀴니우스는 정숙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루크레티아를 본 순간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였고, 밤중에 몰래 진중을 빠져나와 그녀의 집을 찾는다. 남편의 친구이자 왕자의 신분인 그를 루크레티아는 정중히 맞이하지만,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루크레티아를 범하고 만다.
치욕을 당한 루크레티아는 바로 자결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면 어떤 오명이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게 덧씌워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루크레티아는 다음날 남편과 친정아버지에게 각각 편지를 보낸다. 소복을 차려입은 루크레티아는 급히 달려온 두 사람에게 타르퀴니우스가 저지른 일을 모두 말하고 반드시 복수해 줄 것을 부탁한 다음, 그 자리에서 자결하고 만다.(그림)
분노와 억울함에 찬 남편과 친정아버지는 그녀의 시신을 로마의 광장으로 운구한 후, 그것이 타르퀴니우스의 소행임을 시민들에게 알린다. 그렇지 않아도 누군가가 내몰아 주기를 바라던 폭군의 아들이 그런 악행을 저지른 것에 분노한 시민들이 들고일어나 왕과 그 일족을 몰아내고 로마를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꾼다.
루크레티아의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에 의해 재조명된 이후, 이 이야기는 르네상스 시기와 그 이후의 많은 미술가들에 의하여 묘사되었다. 티치아노(Tiziano), 시몽 부에(Simon Vouet) 뒤러(Albrecht Durer) 등 많은 작가들이 그렸다. 이 그림은 독일의 화가인 루카스 크라나흐 엘더(Lucas Cranach, 1472년~1553년)의 작품이다. 크라나흐는 종교개혁의 상징 마르틴 루터와 절친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마르틴 루터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고, 루터가 주관한 성경의 독일어판 번역에 목판화 삽화를 제공하기도 했다.
독일의 중남부 프랑켄 지방에서 태어난 크라나흐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그는 당대에 뛰어난 장식 화가이자 초상화 제작자, 그리고 제단화와 목판화 그리고 판화 제작자로 유명하다.
그의 화풍은 독일의 풍경을 매우 서정적으로 그렸으며, 그가 남긴 그림에서는 후대의 표현주의의 전조가 느껴질 만큼 색채가 진하고 드라마틱한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1505년 비텐베르크에 이사한 그는 아틀리에를 차리고, 신화에 기초한 여성의 나체상을 많이 그렸으며 앞서 이야기했듯이 루터나 기타 저명인사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1537~1544년에 걸쳐 그곳 비텐베르크 시장(市長)을 지내며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또한 루터의 종교개혁을 열렬하게 지지하기도 하였고, 만년에 가서는 바이마르의 궁정화가로 지내다가 1553년 궁정화가로서 운명하였다. 또 이름이 같은 그의 아들(1515~1586)도 화가로서 부친의 조수·후계자가 되어 활약하였다.
Lucretia(1530) oil on panel(목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