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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Feb 17. 2022

‘觀點(관점)’에 대하여


오늘, 어떤 화가의 그림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이야기했다. 나는 작가의 삶이 투영된 그의 작업에 비중을 두는 반면 이야기의 상대방은 그런 조건을 공제한 순수한 작품에 대한 평가였다. 결론을 낼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또 결론을 내지 말아야 할 일이지만 집으로 돌아와 관점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거나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다만 인간은 각자 고유의 에너지인 ‘의지’를 통해 의욕되고, 그로부터 산출된 가상을 만들어 그것을 인식할 뿐이다.( F. Nietzsche, The Gay Science, Book 5, Section 343(1882), Walter Kaufmann, 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2010) 즉, 이는 유기체가 ‘살아내기 위해 알맞은 만큼’만 세계를 인식하는 것과 같다.


니체는 이러한 인간 특유의 관점 성 때문에 인간의 세계 인식은, 그 자체로 오류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미 ‘인간적인 세계’로 바뀐 외부 세계에서 참, 거짓의 이분법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참된 세계라는 말 자체가 위에 언급한 ‘살아내기 위해 알맞은 만큼’이라는 유용성 전략에 의해 포착된 假像(가상)으로서 무의미한 대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실재에 대한 객관적 진리’ 란 없으며, 인간에겐 오직 특유의 해석적, 주관적 진리, 이를 테면 假像이며 誤謬(오류)인,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오로지 그 주체에게는 의미 있을 ‘진리’ 만이 가능할 뿐이다.


물론 여기에는 수많은 맹점이 있다. 가상과 오류의 범위를 넘는 절대적 관점도 분명 존재한다.(예를 들자면 ‘지구는 태양을 공전한다’. ‘빛의 속도는 약 초속 30만 킬로미터이다’. 등) 니체의 ‘관점’ 역시 오로지 니체의 ‘관점’ 일뿐이다.


니체의 관점을 예술에 적용해보자. 


명화라고 여겨지는 그림과 명곡이라고 여겨지는 음악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같은 이유로 문학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절대적 기준은 존재한다. 물론 최근의 경향은 이 절대적 기준조차도 와해되는 특징이 있지만 그래도 예술에 대한 상식 선은 있다.


그림을 보는 관점은 니체의 이야기처럼 가상에 가깝다. 가상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매우 객관적인 조건과 관람자의 주관적인 조건이 가상을 형성한다. 객관적인 조건 중에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린 작가의 공표된 정보로서 작가 개인의 삶과 그로부터 형성된 평판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주관적인 조건이란 완전히 관람자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서 미적 체험을 기초로 하는 先驗, 그리고 작가의 정보에 대한 내적 연결 강도 등이 절묘하게 혼합되어 독특한 관점이 형성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假像으로 수렴할 수 있다. 가상의 관점은 절대적 관점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예술의 세계는 늘 열려있고 다양한 관점이 교차하는 지점이 된다. 그리하여 이러 경구로 귀결된다.


'Ars longa, vita brev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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