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나의 생각
1. 사유의 방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사유의 방이 있다. 박물관 측에서 설명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유의 방은 삼국시대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제작된 우리나라의 국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두 점을 나란히 전시한 공간이다. 어둡고 고요한 복도를 지나면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고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을 만나볼 수 있다. 뛰어난 주조기술을 바탕으로 간결하면서도 생동감 넘치고,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근엄한 반가사유상의 모습은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깊은 고뇌와 깨달음을 상징한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왼쪽 발을 그대로 두고 오른쪽 발만을 왼쪽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는 반가부좌(半跏趺坐) 자세에 왼손으로는 오른쪽 다리의 발목을 잡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뺨에 살짝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思惟는 생각의 범위 내에서 최고의 단계 혹은 경지를 말한다. 惟는 ‘설문해자’에 따르면 마음 心과 높을 崔(최)가 만나 높을 최의 풀 초가 사라진 단어다. 일반적으로 그 뜻은 대상을 구별하여 생각하고, 그 생각의 상황을 살펴 추리하고 동시에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어려운 생각의 단계다. 산스크리트어로는 ‘saakalpa’ 또는 ‘mōkṣaḥ’ 로 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해탈이라는 뜻이다.
원래 이 상은 석가모니가 태자였을 때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해,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는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3세기경(부처 사후 700년 뒤) 마투라(mathura) 조각과 간다라(Gandhara) 미술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투라 미술(Art of Mathura)은 인도에서 불교, 자이나교, 힌두교가 인도에서 번성한 기간 중 인도 중심부 마투라를 중심으로 하여 기원전 2세기를 기점으로 번성한 조형 미술을 가리킨다.
간다라(Gandhara) 미술은 그리스 불교 미술(Greco-Buddhist art)로도 불리는데 인도의 서북쪽 끝, 간다라 지방을 중심으로 기원 전후부터 수세기 동안 번성한 불교 미술이다. 원래 불교도는 부처를 상(像)으로 표현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지만 기원을 전후하여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서북 인도에서 그리스 조각의 수법을 사용하여 불상이나 보살상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고, 불상 숭배의 유행이 일어났다.
중국의 경우는 일찍이 5세기 후반 윈강(雲岡) 석굴에 나타나지만 6세기 후반 북제(北齊) 시대에 성행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와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처음 만들어질 때의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이 아니라 미륵보살로 추정하고 있다. 석가모니 이후에 나타날 미륵불이 태자사유상형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6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해 통일신라 초기까지 많은 반가사유상이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있는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비롯해 봉화에서 출토된 반가사유상을 들 수 있다.
일본에 전해진 고우류사 [廣隆寺]에 있는 목조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국보 제83호의 반가사유상과 거의 같은 형태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많은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진 점, 그리고 당시 삼국과 일본 간의 교류관계를 살펴볼 때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학설일 뿐, 일본 국보 1호로 지정)
2. 미륵
미륵(彌勒,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레야 Maitreya)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미륵보살과 다른 실존 인물이다. 남인도 바라나시 국의 바라문 출신으로서 불교에 귀의해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등을 지어 유가행파(유식학파)를 열어 그 개조가 됐고, 무착(無著, 300?~390?) 등을 가르쳤다.
미륵보살로 알려진 미륵불(彌勒佛)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부처 가운데 하나로,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불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역시 마이트레야(Maitreya)이며, 미륵은 성씨이고 이름은 아지타(Ajita, 阿逸多)이다. 미륵을 이미지로 번역하여 자씨(慈氏), 자씨보살로도 불린다. 인도의 바라나시 국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으며 수도했고, 부처님으로부터 미래불의 수기를 받고 현재 윤회의 마지막 일생을 도솔천에서 설법하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석가모니불 열반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나면 세상에 출현해 화림원(華林園)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해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것이라고 한다. 성불하기 이전까지는 미륵보살이라 하고, 성불한 이후는 미륵불이라 한다. 미륵불을 그 절의 주존으로 모실 경우, 그 전각을 용화전(龍華殿)이라 하고, 부속 전각에 모실 경우엔 미륵전이라 한다. 여기서 56억 7천만 년은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인식의 개념이다. 불교 유식론에서는 인간의 인식을 9식으로 나누고 56억 7천만 년 후라는 것은 그중 5, 6, 7식이 혼란스러워진 상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3. 부처의 모습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인(백제는 동진, 고구려는 전진) 우리는 중국 불교의 불상 숭배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여 엄청난 조형 예술을 창조하였다.(아주 깊숙하게 서양의 헬레니즘 전통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생각하는 불교의 모습은 매우 靜的인 면이 강하다. 대부분 가만히 앉아 계시는 부처 상을 우리는 1600년 동안 만들어왔고 또 보아왔다.
하지만 초기 경전에 의하면 부처는 일생을 걷고 또 걸었다. 평생 설법을 위해 옮겨 다닌 거리도 거리지만 대부분의 부처이야기는 길에서 만났거나 아니면 길을 걸으며 이루어지는 이야기들이 많다. 물론 잠시의 참선을 위한 정좌가 없을 수 없었겠지만 인간 부처의 삶 자체는 걷고 또 걸으며 불법을 전파했다는 것이 경전의 기록이다.
우리에게 보이는 현재의 부처 상은 중국을 거치고 다시 우리의 고대국가들을 거치며 현재의 모습, 앉아 계시는 부처로 굳어진 것일 수도 있다. 부처께서는 두타행을 하셨고 설법을 위해 언제나 걸음을 재촉하셨는데 어떤 이유든 간에 의도적 권위 부여에 따라 지금의 좌불로 우리에게 각인된 것이다.
그래서 늘 생각은 앉아서 하는 것인데 사유는 더욱 그렇다고 판단한다. 삐딱한 나는 사유의 방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서서 하는 사유도 있고 또 서서 하는 사유야 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유의 방식이 아닐까 싶다. 물론 半跏(반가)이니 반쯤은 서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