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정돈하려고 그림을 보니 이런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1. 계산포무도 1849
『장자』 胠篋(거협)에는 도척이라는 도둑놈이야기를 통해 높은 성인의 도덕을 비판하고 온갖 유위를 무용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중 “大巧若拙(대교약졸) 즉, 큰 기술은 마치 졸렬한 것 같다”라는 말이 나온다 『노자』45장에도 똑 같은 말이 있다. 이 그림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바로 대교약졸이다.
붓이 거칠다. 정제된 맛은 전혀 없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느낌은 머리를 파고든다. 이상한 일이다. 집을 그린 솜씨로 보면 전문 화공은 아닌가 싶다가도 나무를 그린 먹의 농담은 전문 화공보다 모자람이 없다. 글씨는 활기차고 뚜렷해서 전혀 고분고분하지 않다. 禿筆(독필), 즉 붓끝이 다 닳은 붓으로 쓰는 글씨 혹은 그림을 말하는데 이 그림과 거기에 쓰인 글씨 모두가 독필로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 전기(田琦)는 1825년(순조(純祖)25년) 개성 전씨(開城田氏) 가문에서 태어나 30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다. 자는 이견(而見)이고 호는 고람(古藍)이다.
이 그림을 그렸을 때 그의 나이는 24세였는데 이 그림을 본 추사는 그를 높이 칭송했다 한다. 이런 이유로 추사는 전기를 매우 아꼈다고 전해 진다. 古藍은 중인 신분으로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지냈기 때문에 그림과 관련한 별다른 이력이 없다. 다만 시와 그림에 능해 역시 추사의 문하생들인 우봉 조희룡, 역매 오경석 등과 가깝게 지냈다. 천재성은 누구보다 동시대 화가들이 먼저 알아본다. 고람이 그린 매화서옥도, 매화초옥도는 오경석과 관계가 있다.
拙美라는 것이 있다. 근세 이전 서양에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미의 기준이다. 서양 예술은 균형과 조화로부터 출발해서 충만과 완벽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동양은 약간 비어있고 굽어있으며 허물어진 것에도 미적 감각을 읽어내고 가끔은 조화와 균형의 미보다 더 우위에 두기도 한다. 그것을 우리는 ‘졸미’라고 부른다. 서양인들은 19세기 넘어서 비로소 이 ‘졸미’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린 날짜가 7월이니(옆에 쓰인 글씨) 요즘으로 치면 양력 8월이다. 아직은 여름이고 막 가을에 접어들었는데 그림의 분위기는 겨울처럼 황량하다. 화제에 등장하는 ‘苞(포)’는 ‘그령’이다.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은데 초가집만큼 크게 그렸다. 그령은 '크령', 도는 '지장풀'이라고 불린다. 우리가 아는 '결초보은'의 그 풀이 바로 이 그령이다. 무성해 보이지 않으나 그는 문득 ‘茂(무: 무성하다)’를 쓰고 있다. 전기는 그령을 초가 뒤에 크게 몇 그루 그려 놓고 다만 황량함을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소나무를 가운데 세워 화면을 이등분하고 초가 반대쪽은 거의 비워두었다. 전기가 추구했던 삶의 모습이었으리라. 뒤로 보이는 산은 비교적 낮다. 계산의 높이가 소나무처럼 높아졌다가 계곡처럼 낮아진다. 바로 그것이 이 그림의 매력이다. 마음의 모습처럼 도저히 具顯낼 수 없는 관념의 세계를 전기는 그림에 담아내고 있다. 계곡과 산이 어우러진 산수화가 가지는 세련되고 풍부한 맛은 그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계곡은 가늠하기 어렵고 산은 수려하지도 않은데 그림 중간에 우뚝 소나무를 그려놓고 초가와 그령을 그렸다. 요절한 자의 슬픔인가? 이 그림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 있다. 37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흐가 그린 아를의 풍경이다. 40년 뒤 프랑스에서는 고흐가 이런 그림을 그렸다.
2. 비현실적 색채로 표현한 Arles 풍경 Vincent van Gogh - Blick Auf Arles 1889
Vincent van Gogh 는 어려서부터 신중한 성격이었던 그는 청소년기에 기독교에 감화되어 목사가 되고자 했지만 그의 광적이고 자기중심적 성격 탓에 전도사조차 되어보지 못한 채 20대 초반에 미술품 중계 상에 취직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그림은 그가 파리를 떠나 남부 아를로 가서 그린 죽기 한 해 전 작품인데 그의 색채 감각과 사물에 대한 인식이 고스란히 담긴 그림이다. 화면 가운데 나무를 배치한 이 위험천만한 구도는 특유의 색채감으로 극복하고 있지만 이런 위험한 구도를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그것은 천재의 느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얼핏 든다. ‘계산포무도’에서 화면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소나무처럼 천재들은 위험을 즐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그림을 그린 방식은 물감을 나이프나 다른 도구를 이용해 캔버스에 칠한 것이 아니라 물감 튜브를 그대로 캔버스 위에 짜면서 그림을 그리고 다른 부분은 손가락을 이용하여 그린 것이다. 이것은 고흐만의 독특한 방법은 아니나 고흐의 그림에서 느끼는 임파스토는 매우 다른 질감을 느낄 수 있다.
아를의 풍경에서 고흐가 받았던 색채의 느낌은 블루였던 모양이다. 나무도 들판도 모두 푸른색이다. 그의 그림에서 느끼는 색채는 확실히 이전 인상파 화가와는 다른 것이어서 독자적이고 비현실적인 부분이 많다. 이런 이유로 고흐는 20세기 초 미술의 새로운 흐름이 되는 표현주의, 야수파의 시조라고 불릴 만하다.
고갱과 함께 행복한 예술 촌을 꿈꾸었던 고흐는 고갱의 거만함과 품위 있음에 스스로 위축되었고 그 결과 고갱을 떠나게 만들었으며 그 사건으로 그는 그의 귀를 잘라버리는 극단의 선택을 한다. 광적인 삶을 살면서 정신이 온전했던 모든 순간동안은 그림을 그렸던 고흐의 삶을 그의 그림으로 추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