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규탄하며 러시아는 1초라도 빨리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우크라이나 민중의 고통이 빨리 끝나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쓴다.
안경 쓴 남자
Mstislav Valerianovich Dobuzhinsky(므스티슬라프 도부진스키 1875~1957)는 일멘 호수가 도도한 러시아 노브고르도 출신의 화가이다. 장교 집안에서 태어난 도부진스키는 10살 무렵 그 지역의 미술가 진흥회에서 후원하는 회화 학교에 다니게 된다. 20세 때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어 개인 스튜디오에서 미술 수업을 받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도부진스키는 독일 뮌헨에서 슬라브 핏줄의 위대한 미술교사 안톤 아즈베(Anton Ažbe 1862~1905)에게 배우며 동시에 헝가리 근대 미술(표현주의,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의 대가인 시몬 홀로시(Simon Hollósy 1857~1918)에게 사사하게 된다.
뮌헨에 머무르면서 도부진스키는 유겐스틸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유겐스틸(Jugendstil)이란 영어 ‘Youth Style’의 독일어 표현이다. 러시아로 돌아온 후, 그는 18세기의 예술을 숭상하여 그 시대를 ‘우아한 시대’로 이상화한 예술 서클인 Mir iskusstva(영어 World of Art)에 가입했다.
도부진스키의 예술세계는 당시 러시아에서 일어난 변화, 즉 혁명으로 달라지고 있는 황량한 도시 경관과 자연에 대한 관심을 표현주의적 태도로 묘사하고자 했다.(다른 Mir iskusstva의 구성원들의 오로지 낭만적인 태도와는 과는 다른 예술 세계로 나아간다.) 그는 현대의 악몽 같은 황량함과 외로움을 표현한 도시 생활의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장면을 있는 그대로 그림으로 묘사했다.
도부진스키도 Mir iskusstva의 다른 구성원들처럼 풍경 디자인을 투영한 다양한 무대 디자인을 실험했는데 처음에는 모스크바 예술 극장의 창립자이자 배우이자 연출가였던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Konstantin Stanislavski, 1863~1938)를 위해 일했지만, 나중에는 근대 러시아 발레의 대부이자 미술 평론가인 댜길레프(Sergei Diaghilev, 1872~1929) 작품에도 참여했다. 당시 도부진스키는 뛰어난 미술 교사로도 유명했다.
그의 대표작인 ‘안경 쓴 남자’(A man with eyeglasses, or The portrait of Konstantin Sunnerberg, 1901-1902)를 통해 도부진스키를 이해해 보자. 그림의 모델이 된 안경을 쓴 남자는 Konstantin Alexandrovich Sünnerberg (통상 Konstantin Erberg 콘스탄틴 에르베르크로 불린다.)는 실제 시인이자 비평가였다.
역광으로 처리된 그의 얼굴은 모호하지만 강인해 보인다. 잘 정리된 머리카락과 수염, 그리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옷은 그의 삶을 대변한다. 실제 에르베르크는 이렇게 생겼으며 그의 손은 지나치게 고왔다고 한다. 안경을 쓴 것 까지는 알 수 있지만 안경 속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다. 반면 창 밖 풍경은 확연하다. 아마도 1905년 러시아의 풍경에 대한 도부진스키의 솔직한 표현일 수도 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러시아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시인의 검은 얼굴처럼 모호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변혁의 물결이 몰아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밝다고 해서 그저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말없이 불쑥 솟은 공장의 굴뚝, 무미건조해 보이는, 심지어 러시아 전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공동주택단지가 당시 러시아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과거 아름다움과 예술이 살아있던 러시아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려진 '1830년대의 지방 풍경'(City in Nikolaev times, 니콜라이 1세 시절 1907~1909)은 도부진스키의 복잡한 마음을 잘 표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