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식 Feb 05. 2022

'장자' 대종사 이야기와 '존재'

1.좌망


『장자』 大宗師(대종사) 마지막쯤에 ‘공자’와 ‘안연(안회)’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문득 ‘안회’가 스승에게 ‘坐忘’ 이야기를 꺼내며 스스로 그 경지에 이르렀다고 ‘공자’에게 말한다. ‘공자’가 깜짝 놀라며 ‘좌망’이 뭐냐고 묻는다. 그랬더니 ‘안연’은 “墮枝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휴지체 출총명 리형거지 동어대통 차위좌망)”이라고 말한다. (墮를 ‘떨어뜨리다’로 새기면 ‘타’가 되고 ‘무너뜨리다’로 새기면 ‘휴’가 맞다.) 해석하자면 “몸의 감각을 버리고(무너뜨리고) 듣고 보는 작용(총명)을 멀리하여 형체가 있는 몸을 떠나면 대통의 세계와 같아지는데 이것을 ‘좌망’이라 합니다.” 뭐 대충 이런 뜻이다. ‘공자’가 놀랄만하다. 제자가 얻은 경지가 예사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는 ‘안연’의 말을 다 듣고 마지못해 “請從而後也(청종이후야)” 즉, 너를 따르겠다고 이야기한다. 제자를 따르는 스승이라...... 장주는 마음껏 공자를 조롱한다.  



어쨌거나! 그러면 ‘大通’의 세계란 무엇일까? 어떤 이는 ‘大道’라 하고 어떤 이는 ‘眞理’라 하며 또 어떤 이는 ‘達觀’이라 이야기한다. 通을 파자해 보면 골목길 용(甬)과 쉬엄쉬엄 갈 착(辵)으로 된 형성 자다. 즉 골목길을 쉬엄쉬엄 걸어가는 모습을 ‘통’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 通 앞에 큰 대가 있으니 이런 행동의 확대, 또는 확산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단순히 길이 잘 연결되어 있음을 넘어 그 연결의 범위가 확산되어 층위를 넘어 다양화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래서 큰길이라는 의미도 또 진리라는 의미도 일맥상통하고 더불어 사소함으로부터 벗어나 경지에 이르는 달관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그러면 그 조건으로 이야기한 몸의 감각을 무너뜨리는 것은 무엇인가? 몸의 감각에 따르지 않음이다. 이를테면 감각에 휘둘리지 않는 상태나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기관에 전해져 오는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엄청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그렇게 자유로워지면 외부의 자극을 분석하지 않게 되는데 이것을 黜聰明이라 했다. 黜(출)은 물리침(또는 멀리함)이니 이것은 강력한 의지의 작용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또 하나의 조건은 형체가 몸을 떠나는(離形去知) 단계다.


이형거지란 형체에 연연하지 않는 경지를 말함인데 『장자』 전체를 통해 ‘형체’와 ‘형태’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그것에 연연하지 않는 단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장면은 매우 드물다. 오히려 이형거지의 경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사무색처(四無色處, akasanancayatana,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와 비슷하다. 즉, 형체도 없고 근본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는 상황(견성성불의 경지)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하여 생각하건대 이 부분은 아마도 처음 『장자』가 쓰인 후 인도에서 불교가 유입되어 불교적 사고를 가진 후학들에 의해 부가된 내용이 것이 아닐까 싶다.(물론 완전히 나의 생각이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좌망’은 무엇인가? 玄妙難測(현묘 난측), 즉 깊고 미묘하여 헤아릴 수 없고, 無形無相(무상무형),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언어 밖의 경지(不立文字)로서 부처의 초기 경전 쿳다까 니까야 (Khuddaka Nikāya)에 속에서도 발견된다. 니까야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가? 그곳에는 옴(來-탄생)이 없다. 감(去-죽음)도, 머묾(住-삶)도, 재생(윤회전생)도 없다. 나루터도 없고, 윤회도 없고, 의지처도 없다. 그러나 진실한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더 이상 나고 죽지 않는 세계이며, 더 이상 변화를 겪을 필요가 없는 세계다.”


그걸 안회가 이루었다고? 이런!! 그래서 공자가 안회를 따르게 되었다고? 믿거나 말거나!



2.‘존재’


당신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당신들이 ‘존재하는’ 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우리도 전에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당혹스러움에 빠져 있다.(플라톤, 소피스트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이창우 옮김. 2011)


하이데거의 저작 “존재와 시간”의 첫 부분에 이 말이 인용되어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아주 장황하게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런가 하면,  


『장자』 齊物論(제물론)에 ‘설결’과 ‘왕예’가 나눈 대화에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齧缺(설결, 이상론자 허유의 스승)이 王倪(왕예, 설결의 스승이고 피의의 제자)에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모든 존재가 다 옳다고 인정되는 것에 대해서 아십니까?” (여기서 옳다는 말은 하이데거의 표현에 따라 ‘존재의 세계성’, ‘있음’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왕예가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선생께서는 선생이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아십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그렇다면 모든 존재에 대해 앎이 없습니까?”

왕예가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틀릴 수도 있지만) 말해보겠다.

내가 이른바 안다고 하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으며, 내가 이른바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즉, 무엇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 무엇은 존재다.


주말 내내 머리 속을 빙빙 도는 이야기를 옮겨 놓으니 내가 한 말인지, 내가 하려고 한 말인지, 아니면 내가 하려고 하는 말이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혼란한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