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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Feb 10. 2022

다시 열자를 떠 올리며

장자 덕충부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노나라에 다리가 하나인(즉 몸이 완전치 못한) ‘왕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이 ‘중니’(공자)와 견줄 만큼이다. ‘상계’(공자의 제자는 아님)가 ‘중니’에게 물었다. 



“왕태는 다리가 하나뿐인 사람인데 그를 따라 배우는 자들이 선생님과 함께 노나라를 반분하고 있답니다. 그는 서서 가르치지도 않고 앉아서 논의하지도 않지만 사람들은 비어서 갔다가 가득 차서 돌아옵니다. 왕태에게는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이 있어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서도 마음을 채우는 사람이라는데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중니’가 말하였다. “그 사람은 성인이다. 나도 미루다 보니 아직 찾아가지 못했을 따름이다. 나 역시 스승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하물며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야! 어찌 노나라에만 이를 것인가! 장차 천하 사람들을 이끌고서 함께 그를 따르려고 한다.”



‘상계’가 말하였다. “저 사람은 다리가 하나뿐인데도 선생님보다 훌륭하다고 하니, 그 사람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습니까?" 



‘중니’가 말했다. “죽고 사는 것 또한 큰 일이지만 그것은 그에게 변화를 주지는 못한다. 비록 천지가 개벽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변화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참으로 진실한 것을 깨달아 사물과 함께 옮겨 다니지 않으며(사물에 휘둘리지 않으며), 사물이 변화하는 것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여 그 근본을 지킨다.” 



‘상계’가 말하였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중니’가 말하였다. “다르다고 보면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멀고, 같다고 보면 만물도 모두 하나이다. 무릇 이 같은 자는 보고 들음에 옳다고 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무용한 세간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고) 덕이 조화되는 곳에 마음을 노닐게 한다. 사물에 대해서는 그 하나 됨을 보고 그렇지 아니함(부조화 혹은 분별심)을 보지 않으니 그에게 발 하나 없는 것은 그저 (몸에 묻은) 흙을 털어버리는 정도로 여긴다.” 



‘상계’가 말하였다. “그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신만의 지혜로 자신만의 마음을 터득하고 자신만의 마음으로 평안한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에게 모이는 것입니까?” 



‘중니’가 말하였다. “사람은 흐르는 물을 거울삼을 수 없고 오로지 멈추어 있는 물에서 거울을 삼을 수 있다. 멈추어 있는 것만이 장차 멈추려고 하는 것들을 멈추게 할 수 있다. 땅에서 생명을 받은 것으로는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 만이 홀로 겨울이나 여름에도 푸르다. 하늘에서 생명을 받은 것으로는 오직 요와 순만이 홀로 올바르기 때문에 만물의 높은 자리에 있게 되었고 능히 자신의 생명을 바로 함으로써 사람들의 생명을 바르게 할 수 있었다.(무슨 말인지 모호하다. 하지만 핵심은 불변하는 진리는 자연의 도리라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무릇 처음을 잃지 않고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참이다. 




<중략> 그 사람은 곧 삶과 죽음을 넘는 경지에 오른 것을 사람들이 알기 때문에 비록 다리 하나가 없어도 사람들은 그를 따르는 것이다.” (우리의 ‘장자’ 본인이 하고 싶은 말)



두 다리도 멀쩡하고 하물며 생긴 것도 멀쩡한 사람들이 연일 몸이 불편한 사람들보다 더 불편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머리도 좋고 권력도 있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한결같이 유치원생보다 못하다.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사람이 일하다 죽었는데 책임지는 놈이 단 한 놈도 없다. 이것은 또 어찌 된 일인가? 나의 상식은 상식이 아닌 모양이다. 또 열자 생각이 난다. 그저 밥 해 먹고 가족 돌보는 일로 도를 닦아야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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