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

by 김준식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매일 약 3km 정도를 산책한다.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또 새로운 생각을 하기도 한다. 오늘은 이 ‘생각’에 대하여 ‘생각’ 해 본다.


불교에서는 이 '생각'이 곧 '번뇌'다. 생각에서 ‘각’은 배울 학(學)과 볼 견(見)이 만난 회의 문자다. 즉 배운 것을 다시 반추해보는 것, 좀 더 적극적으로 의역해보자면 경험했거나 이전에 한 번쯤 떠올렸던 것을 다시 꺼내어 보는 것이다. 볼 견(見)을 썼으니 의지를 가진 행위로 이해하여 배운 것이나 경험했던 것을 꺼내어 다시 보겠다는 것 까지가 覺의 의미다. 앞 글자 生은 그러한 각을 일으키는 인간의 의지를 말함인데, 이 覺을 일으키는 데 걸리는 시간을 불교에서는 ‘찰나’라고 부른다. 刹那라는 한자어는 범어 '크샤나'(kṣaṇa)의 음차로서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초의 개념으로 환산하면 1 찰나는 1/75초(약 0.013초)에 해당한다.(불교 경전 阿毘達磨大毘婆沙論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즉 한 생각과 한 생각이 바뀌는 시간은 이렇게 짧으니 우리는 순간에도 수 없는 번뇌와 망상에 시달린다.


어쨌거나 불교에서는 이렇게 일어난 생각(念)을 없애려고 하고 그것을 최고의 목표로 하여 수행하고 또 수행한다. 그 처음이 無念이고 다음이 無相이다. 완벽한 경지는 無住다.


생각이 없는 무념(無念)은 생각 속에 헛된 생각이 없는 것으로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나아가서 무념은 생각이 없다기보다는 자유롭게 생각하며 여러 대상과 접촉하는 생각의 다른 모습이다. 여러 대상과 접촉하면 보고 듣는 작용이 동시에 쉼 없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때, 그런 작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생각에 오염되지 않아야 비로소 무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무념에서 ‘無’는 잘못된 생각이 없는 것이다.(바른 생각은 분명히 존재한다. 바른의 정의는 모호하지만……)


무상(無相)에서 ‘相’은 망집으로 일어나는 虛像을 말한다. 즉 우리들의 생각인 상(想)이 마음 밖의 대상으로 실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상(相)이다. 그리하여 無相은 ‘상 속에 있으면서도 상을 떠나는 것’이다. 즉 差別相 속에 있으면서도 그 차별상을 공(空)으로 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갖가지 차별상과 모든 경계에서 집착을 떠난 것이 무상이다.


무주(無住)란 그 어느 것도 얻을 수 없고 그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마침내 집착이 사라지니 마침내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생각이나 찰나에 머무는 것은 곧 속박이다. 따라서 모든 법으로부터 그리고 어떤 찰나에도 머무르지 않으니 속박은 없다. 그것이 바로 무주다.


생각을 생각하니 말이 떠 오른다. 생각은 거의 글과 말에 의해 옮겨진다. 이런 말이 있다. 개구즉착(開口卽錯) 입을 여는 순간 어긋난 버린다(틀린다)는 뜻. ‘말한 즉 곧 틀리게 된다.’ ‘입만 벌리면 잘못 말하게 된다.’ ‘입을 벙긋하는 순간 어긋난다.’ 대체로 이런 뜻으로 진리의 세계는 말로 표현하려면, 곧 입을 여는 순간 참모습과는 달리 빗나간다는 말이다.


어떤 생각 또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입 밖으로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언어의 한계, 표현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도 무섭지만 말과 글은 더 무섭다. 나의 경우를 돌이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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