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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n 30. 2022

《장자》'칙양' 이야기

강의를 마치고


《장자》 강의를 끝내고 집에 와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장자》의 내용을 공부하면서 같이 공부하시는 분들의 개인적 소회는 현재의 상황을 알려주는 나침반 같은 것이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분(이렇게 부르기로 한다.)께서 공부가 끝난 뒤 오늘 공부한 내용(《장자》 ‘칙양’의 ‘공열후’ 이야기와 ‘칙양’의 마지막 부분 “非言非黙 議其有極”)에 대한 내용을 돌아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특히 내가 이렇게 해석한 마지막 부분(“非言非黙 議其有極” - “언어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어야 궁극의 경지를 논의할 수 있다.”)을 인용하시며, 이 말을 들으니 마치 신선처럼 자유로운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의 《장자》 공부가 궤도를 이탈한 느낌이 들었다. 집에 오는 내내 나의 《장자》 강의가 무용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용지용인가? ㅎㅎㅎ


사실 '노자'와 '장자' 사상도 엄밀하게는 ‘제왕학’에 가깝다. 즉 춘추전국시대를 살았던 ‘노자’ ‘장자’의 고매한 ‘도’ 이야기나 또는 ‘처세’의 논리처럼 보이지만, 결국 목적은 이런 생각(노자, 장자의 이야기를 중심에 둔)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되면 좀 더 강력하고 안정된 나라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제언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이견이 있을 수 있음)


따라서 거기에는 아득히 구름 피어오르는 仙界에서 무욕과 무심의 경지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그런 것을 찾으려 노력한다. 오늘 저녁 이 말(“언어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어야 궁극의 경지를 논의할 수 있다.”)도 사실은 치열한 논증의 방식이며, 반드시 궁극의 경지를 밝히는 방법론적 고민으로써 거기에는 강력한 실존의 의지가 있는 말이다. 그것을 자유롭다고 이야기하는 그분의 생각을 따라 잡기는 어렵다. 


중국 서진의 《장자》 전문가인 곽상은 이 말을 뒤집어 “언어로도 침묵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을 나타낸 말”이라고 해석한다. 즉 자연의 철저함과 완벽함, 그리고 인간의 논리와 윤리를 넘는 상황에 대한 간접적 표현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분’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필터링을 통한 생각을 피력하셨다. 


여기에는 자연에 대한 오해도 큰 몫을 차지한다. 자연은 완벽하지만 인간의 관점에서는 매우 비정할 수 있다. 자연은 빈틈없지만 인간의 관점에서는 허점투성이 일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점이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장자》전편에 걸쳐 자주 등장한다. 자연은 인간에게 공정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지만 자연 스스로는 가장 완벽한 질서일 것이라고 ‘장자’는 《장자》에서 말하고 있다. 


그분은 이 공부가 필요 없는 분이거나 아니면 이미 다른 경지에 이르신 것일까? 아침까지 생각이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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