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正, 天地不仁, 大仁不仁, 至仁無親
노자 도덕경 산책(4)
公正, 天地不仁, 大仁不仁, 至仁無親
아무리 무더운 7월이라도 새벽이나 아침은 그래도 조금 시원하다. 일요일 새벽은 참 좋다. 물론 평일 새벽도 좋지만 일요일은 출근에 대한 막연한 부담감이 덜하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산책을 하다 보면 더운 공기 덩어리와 만나게 되는데 한 낮 태양열에 의해 데워진 공기가 상층부에 있다가 공기의 흐름 때문에 지표면에 내려앉았는데 우연히 내가 그곳을 통과하면 같은 길인데도 유독 온도가 높음이 느껴진다. 아직 데워지지 않는 공기와 이미 데워진 공기 사이의 밀도 차이가 형성한 불연속선을 지나는 기묘한 느낌을 아침 산책 길에 느끼게 된다. 여기에는 과학적 논리가 있을 뿐 인간이 정한 기준 따위는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이런 것으로부터 유추되는 나의 견해는 자연에서 공정함은 없다는 것이다. 즉 자연은 절대 공평하지 않고 정의롭지도 않다는 것이다. 공평이나 정의의 최대 약점은 ‘기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데 그 기준을 자연은 처음부터 가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가지는 위대함이며 동시에 늘 우리가 배워야 할 절대적 가치의 결정판이다.(여기에도 기준이 작동한다. 쩝!)
우리 집 에어컨 실외기 옆에 지난주부터 산비둘기가 알을 품고 있다. 사실 우리 집은 바로 산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산비둘기로서는 조금 위험하지만 알을 낳고 키우기에 최적의 조건일 것이다. 하지만 나의 기준으로는 산 비둘기가 똥을 싸고 에어컨 실외기와 그 주변을 더럽히기 때문에 알도 둥지도 치우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하지만 생명의 탄생이라는 관점에서 그냥 두기로 했다. 여전히 알을 품고 있는 비둘기를 보며 자연을 생각한다. 매우 세밀하게 이 지점에서 공평과 정의는 없다. 그냥 보이는 현상 그대로다.(하지만 또 다른 기준은 작동한다.)
연일 뉴스를 장식하는 이 나라 최고 권력자들의 불공정과 그 항변을 들으며 그 자체로 하나의 야생 생태계를 보는 느낌이다. 야생의 생태계에서 공정의 의미는 ‘얼룩말 풀 뜯다가 사자에게 잡아 먹히는 소리’쯤일 것이다.
공정하다, 혹은 불공정하다는 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관념의 문제여서 또 다른 기준이 등장하면 곧잘 희석되고 만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현상의 문제를 현상 그대로 볼 수 없고, 언제나 누군가가 정해 준 쓸모없는 기준으로 현상의 그림자를 볼뿐이다. 심지어 자기 기준도 많다. 하지만 자기 기준으로 알고 있는 그 기준도 따지고 보면 타인의 기준이다.
노자께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天地不仁”(도덕경 5장)
“천지는 (누구도)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 즉 천지는 스스로의 인과율에 의해 움직일 뿐, 어떤 것에도 무엇에게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장자》의 ‘제물론’, ‘천지’, ‘경상초’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곧 ‘대인무인’과 ‘지인무친’이다.
‘지인무친(至仁無親)’은 지극한 仁은 친함(치우침)이 없음인데 이는 ‘제물론(齊物論)’의 ‘대인무인(大仁不仁)’과 비슷하다. 즉 큰 인(자연)은 치우침이 없다.
《장자》‘天地’의 “至德之世……相愛而不知以爲仁” 즉, 지극한 덕의 시대(완전한 이상의 시대)에는 서로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仁인 줄 몰랐다 와도 일맥상통한다.
또 이것은 《도덕경》 제38장의 “上仁爲之而無以爲” 즉, ‘상인은 인(仁)을 행하기는 하지만, 인으로 의도하는 것은 없다’ 와도 같다.
정리해보면 자연은, 그 자체가 곧 道이고 그 道는 치우침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는 더위나 우리 집 베란다에 있는 비둘기 알이나 대한민국의 정치행위는 벌써 치우침이 있다. 이미 더위를 느끼는 순간, 비둘기 알이라고 보는 순간, 정치가 있는 순간 그 모든 것에는 기준이 개입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기준 없는 일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노자는 좀 완곡하게 그리고 살짝 모호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나마 자연은 기준이 없다. 그래서 자연을 공정함이라 말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