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 산책(2)

기준의 문제

by 김준식

노자 도덕경 산책(2)

기준의 문제


1. 동위원소


원소 주기율표에 있는 대부분의 원자는 같은 번호 속에 있지만 질량이 다른 각각의 원자를 가진다. 질량의 차이는 중성자의 개수 차이인데, 화학적으로는 거의 동일하지만 물리적으로는 성질이 다른 원자를 동위원소(Isotope)라 부른다. 영어 'Isotope'에서 'isos'(그리스어로서 ‘같다’라는 뜻이고) 'topos'(역시 그리스어로 ‘장소’)가 합쳐진 단어인데 풀이해 보자면 ‘같은 장소에 위치하는’ 쯤으로 풀이된다. 그러니까 동위원소는 주기율표 내에서 같은 번호에 묶여있지만 실제로는 물리적으로 약간 다른 성질의 물질이라는 이야기다.


원자번호 55번 Cs(Cesium, 세슘)는 라틴어의 ‘caesius’(영어로 blue-gray, 청회색)에서 유래된 것처럼 청회색이 도는 알칼리 금속이다. 이 세슘원자의 동위원소인 세슘 – 133(즉 세슘은 133개 이상의 동위원소가 있는데 그중 133번째 세슘)이 높은 에너지 상태에서 낮은 에너지 상태로 떨어질 때 나오는 전자기파의 진동 수가 9,192,631,770회인데 이를 현재 원자시계의 1초로 삼고 있다.


즉 1초라는 시간은 세슘 -133 원자의 진동수가 기준이다. 이 기준은 세계 공통이며 심지어 우주 공통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드시 그리고 엄밀히 세계 공통 그리고 우주 공통이어야만 한다. 물질의 기준은 이렇듯 명확해야 하고 또 지켜져야 한다.


2. 기준의 문제


자연계에 살고 있고 자연계의 일원인 인간들에게는 이렇듯 분명한 외부적 기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인 기준은 인간의 역사 전체를 통해 아직도 정확하게 정해진 것이 별로 없다. 아주 간단하게 ‘아름답다’라는 말도 그 기준이 엄청나거나 또는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철학이 생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조차 답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완벽한 외부적 기준 속에서 전혀 알 수 없는 내부적 無 기준의 삶을 오늘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노자 도덕경 제2 장의 내용이 바로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기준이 모호하니 노자께서 이렇게 애매한 이야기로 우리에게 말했을 것이다.


“세상 모두는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추함’ 일 수 있고……” [1]


기준이 없으니 누구에게는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심지어 이미 ‘추함’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반대인 말이라 매우 극단적으로 떨어져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크지만 ‘已’(이미 이)를 쓴 것으로 보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름다움’과 ‘추함’이 있을 수 있고, 어쩌면 ‘아름다움’과 ‘추함’은 동일한 상황으로 일어나는 감각일 수도 있다는 어감을 풍긴다.


상대적이라는 대립 개념을 가정하고, 다시 그 두 개념의 연결을 상정하고 심지어 두 개념을 동시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노자께서 열어 놓으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할 기준의 문제에 봉착한다. 기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준이 수시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져본다. 인간 본성의 변화무쌍함을 노자께서 간파하고 이렇게 묘사했을 수도 있다.


잠시 전,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기준은 변화한다. 그러니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으로 유지되기 어렵다. 추함 역시 다르지 않다.


3. 조화의 문제


2장에서 강조하는 또 하나는 조화다. 유(有) 무(無), 난(難:어려움) 이(易: 쉬움), 장(長) 단(短), 고(高) 하(下)의 조화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조화의 양상은 각각 조금씩 다르다. ‘유무’는 서로로 인해 생겨나고(生), ‘난이’는 서로로 인해 이루어지며(成), ‘장단’은 서로로 인해 어떤 형상이(形) 된다. ‘고하’는 서로를 통해 한계(呈)를 가지게 된다. 계속해서 음(音)은 성(聲)과 서로 어울려야 하고 전(前) 후(後)는 서로를 따르게 된다. [2]


하지만 이것을 성인[3]의 道에 견주는 바람에 도덕경은 형이상학의 범주에서 현실의 제왕학으로 추락하고 만다. 거대한 자연의 생성원리를 변증으로 풀이하고, 다시 정리하여 우주만물의 생성원리에 다가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돌연 엉뚱하게도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이념 정도로 범위를 줄이고 만다. 하기야 이 시대 사람들에게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철학적 또는 형이상학적 가치였을 수 있다.


[1]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노자 도덕경 제2장)

[2] 故有無相生,難易相成,長短相形,高下相呈,音聲相和, 前後相隨.

[3]고대 경전에서 성인은 일반적 의미로 완벽한 통치자의 이미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聖은 귀 이(耳), 즉 ‘듣다’와 '나타낼 정(呈)’ 으로 이루어졌으니 聖人이란 ‘들은 바 대로 나타내는 존재’, 즉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 소리에 맞게 나타낼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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