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 산책(3)
노자께서 문득 이렇게 말씀하신다. “불상현(不尙賢)!”
‘현’을 숭상하지 마라! 또는 ‘현’을 높이 받들지 마라!라고 풀이된다. 뭔 일이지? ‘어짊’을 왜? 문제는 ‘현’에 대한 해석이다. ‘賢’은 ‘단단하다’ 또는 ‘굳다’의 뜻을 가진 ‘간(臤)’과 조개 ‘패(貝)’가 합해진 ‘형성’ 자다. ‘형성’ 자의 특징은 합쳐진 글자 속의 두 글자는 모두 각각의 의미를 잃지 않는다. 즉 臤은 ‘단단하다’는 의미인데 이는 두루 약한 곳이 없다는 의미로서 주로 지식이나 재주 등이 비범한 경우를 비유하는 말이다. 후한의 학자 허신의 설문해자에는 多才로 표현되어 있다.
문제는 조개 貝다. 이것은 재물과 돈을 비유하는 대표적인 글자다. ‘다재’와 ‘돈’ 혹은 ‘재물’이 합쳐진 ‘형성’ 자이니 ‘돈’으로 ‘재주’를 바꾼다는 의미도 되고 ‘재주’를 ‘돈’으로 산다는 의미가 되지만 둘 다 우리가 아는 ‘賢’, 즉 현명하고 어진 것과는 큰 차이가 난다. 아마 노자 이후 이 글자는 오랜 시간을 두고 의미가 변했을 것인데, 노자 당시와 그 후 상당한 시간 동안은 지금 글자의 訓과는 사뭇 다른, 조금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바람에 노자께서 ‘현’을 숭상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 말만 놓고 2022년 내가 사는 세상을 생각해 보니……
재주를 돈으로 사고, 돈으로 재주를 사는 일이 너무 많다. 극악한 자본주의 시대에 살면서 나 역시 재주를 돈으로 바꿔서 생계를 연명하고 있다. 그런데 노자께서도 우리 같은 생계형을 문제 삼은 것은 아닐 것이다. 생계 형의 재주를 숭상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생계형이 아닌 특정한 재주가 타인에게 칼날이 되고 침이 되는 정도의 재주 정도는 되어야지 재주가 팔리고 또 사려고 할 것이다. 어떤 재주를 팔아 이익을 본다는 것은 그 재주가 타인을 위협하고 심지어 해칠 수 있는 재주일 수 있다. 또 그런 재주를 사는 자들은 그 재주를 이용하여 타인을 억압하고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나라에 이런 자들이 득시글 거린다. 자본주의 시대에 자신의 재주를 팔아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것을 누가 나무라겠는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예측할 수 없는 타인과 세상에 심각한 피해가 생기는데 그 피해의 규모가 크고 깊어지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나 역시 큰돈이나 큰 기회를 주면 내 재주를 팔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것은 나에게는 타인에게 해가 될 재주도 없을뿐더러 그나마 재주라 할 만 것도 거의 없다. 그저 입에 풀칠할 재주 정도다. 더 다행인 것은 내 부실하고 천박한 재주를 살 사람은 더 없으니, 나는 발 뻗고 잘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노자께서 尙賢, 즉 잔재주를 숭상하면 그 결과를 이렇게 말한다. 使民爭! (使民不爭인데 이것은 不尙賢 할 때) 즉 백성들이 서로서로 싸우고 지지고 볶는다. 한 마디로 나라가 엉망진창이 된다는 이야기다. 2600년 전 노자 시대의 케케묵은 이야기가 오늘날에 적용될 수 있을까 만, 도덕경을 읽으며 다만 지금 시대를 쓸데없이 홀로 걱정하고 있나니……(잘 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