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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022 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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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Sep 30. 2022

Reality

實在*


蛛網垂微滴 (주망수미적) 거미줄, 가는 물방울에 쳐져,

迤持堂細搖 (이지당세요) 살짝 흔들려도 당당히 버티네. 

無變依五感*(무변의오감) 변화하지 않는 세계를 오감에 따르니,

漸冥混體用*(점명혼체용) 실체와 본질이 뒤섞여 점점 어두워질 뿐.


2022년 9월 30일 아침. 가을 국화를 보기 위해 출근하면서 국화에 물을 주러 갔더니 안개가 거미줄에 물방울을 매달아 놓았다. 아침결 가는 바람에 살짝 흔들리지만 결코 끊어지지 않는 굳건한 거미줄을 보며 뭔가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하지만, 현재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그 어떤 의미도 없는 무변의 자연이고 동시에 실재(Reality) 그 자체다. 거기에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오감으로 인식된 사실에 섣부른 나의 지식이 부가되어 확산될 것인데…… 그러다 보면 처음 거미줄에 매달린 물방울이 거창한 자연의 암시로 곡해될 수도 있다. 


하기야 실재를 보고 글을 쓰는 자체가 벌써 잘못된 시도일 것이다. 


* 실재實在: '실재(reality)'는 ‘현상(現象, phenomenon)’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아침에 본 거미줄 위 물방울의 예를 들어보자 '외부 세계에 거미줄 위 물방울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즉 ' 거미줄 위 물방울은 실재한다'라고 가정해보자. (실체 이야기는 더욱 복잡해지니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실재: 거미줄 위 물방울


현상 

좁게 해석할 경우: 시각을 통해 관측할 수 있는 거미줄, 물방울, 거미줄이 물방울 무게에 처진 모양, 물방울의 질감, 거미줄의 늘어짐 정도, 바람에 흔들리는 거미줄 등등.


넓게 해석할 경우: 전문적 장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거미줄 위 물방울과 바람과 절대적 시간 사이에 존재할 수 있고 계측 가능한 모든 데이터와 그로부터 추론, 확산될 수 있는 생각의 전부.


* 오감: 동양에는 예부터 오행五行의 원리에 따라 ‘오복五福’이니 ‘오륜五倫’이니 ‘오관五官’이니 하는 것처럼 많은 것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습관이 있다. 이처럼 모든 사물과 현상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오행 사상은 전국시대 말기에 유행하였다.


* 체體와 용用: 서양 철학에서는 '실재'와 '현상'이라 부르고 동양의 유교(분명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주자학 이후)에서 실재는 ‘체’로, 현상은 ‘용’의 개념에 각각 대응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은 매우 많아서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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