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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l 06. 2016

La Neige(눈), 1873

고전을 대하는 내면의 풍경

La Neige, 1873. Oil on canvas, 90cmⅹ120cm

장자, 오르세를 걷다 열 한 번 째 이야기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눈 내린 들판 풍경

Charles-François Daubigny(샤를 프랑소와 도비니)의 La Neige(눈), 1873


Charles-François Daubigny(샤를 프랑소와 도비니, 1817~1878)는 바르비종 파의 대표적 화가이자 인상파 회화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는 1817년 파리의 화가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 Edmond François Daubigny(에드몽 프랑소와 도비니)와 삼촌 Pierre Daubigny(피에르 도비니)에게 미술 교육을 받았다. 특히 그의 삼촌 피에르는 당시 유명했던 세밀화가였기 때문에 도비니는 자연스럽게 전통적 회화의 화가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1834년 바르비종 파 예술가들이 살았던 퐁텐블로 숲을 방문한 이후 그의 그림은 전통회화에서 낭만파 회화(바르비종 파)로 선회하게 되고 1852년 Camille Corot(코로)와 옵테보즈에서의 만남은 그를 바르비종 파 회화의 중심인물로 만들었다. 이 시기 그는, 당대의 위대한 화가 Gustave Courbet(쿠르베)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쿠르베는 사실 도비니보다 2살 아래였지만 이미 쿠르베는 화단의 중심인물이었다. 


la Neige(Snow - 눈 : 1873)라는 표제의 이 그림은 말 그대로 눈 내린 들판을 표현하고 있다. 눈 그친 들판에 석양이 질 무렵, 앙상한 나뭇가지와 황량한 들판에는 까마귀들만 모여있다. 역시 Constant Troyon(트루아용)의 그림처럼 화면을 이분하고 있는 지평선은, 보는 이에 따라 불안함과 안정감의 교점에 존재하는 풍경이다. 황갈색의 하늘과 붉은빛이 도는 석양의 구름, 그리고 화면의 왼쪽으로부터 지평선 끝까지 연결된 휘어진 길은 이전의 바르비종 회화들이 가질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1866년 도비니는 영국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향후 인상파의 대가가 되는 Claude Monet(끌로드 모네)를 만나 네덜란드 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 일은 그의 그림에서 바르비종 회화의 낭만적 자연 묘사로부터 나아가 내면의 이미지를 느끼게 되는 작은 이유가 되기도 한다. 보불전쟁으로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도비니는 후일 또 다른 인상파와 현대회화의 초석이 되는 젊은 Paul Cézann(폴 세잔)을 만나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제공하게 된다. 


도비니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바르비종 파의 풍경화가 가지는 직관 묘사의 한계로부터 나아가 내면화된 풍경의 묘사를 시도한 것이다. 이는 인상파 회화가 가지는 자유로운 풍경의 묘사와 함께 풍경 속에서 화가 개인의 내면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풍경의 묘사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장자 이야기

고전을 대하는 내면의 풍경


장자 덕충부에는 '신도가'라는 인물이 나온다.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이지만 현인이다. 그와 동문수학 하는 '자산'이라는 사람은 춘추시대 정나라 재상인데 두 사람의 스승은 '백흔무인'이다. 그런데 장자는 스스로 신도가가 되어 겉모습(다리병신인 신도가를)에 사로잡혀 신도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자산을 형편없는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 


신도가로 화한 장자가 자산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자산의 덕 없음을 꼬집는다. 


今子與我遊於形骸之內 (금자여아유어형해지내): 지금 자네(자산)와 나(신도가)는 정신적으로 사귀고 있을 것인데, 而子索我於形骸之外 (이자색아어형해지외): 내게서 외형적인 것을 찾다니 不亦過乎 (불역과호) : 이것을 어찌 잘못이라 하지 않겠나! 

즉 자산이 신도가의 다리병신임을 빌미로 같이 다니는 것을 피하고 다리병신임을 자꾸 일깨워주려 하자 신도가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우선 보기에 자산은 옹졸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반면 다리병신인 신도가는 그 장애를 넘어 도를 이룬 현자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자산은 자신의 기준으로 신도가를 평가하고 그 가치를 매겨버리고 그것에 따라 신도가를 대했던 것이다. 마치 우리가 우리의 필요에 따라 고전을 대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고전, 특히 동양고전(장자, 사서삼경, 한비자, 사기 등등)을 읽고 배우며 그 속에서 뭔가 자신이 써먹을 수 있는 것을 찾으려 애를 쓴다. 마치 금맥을 캐러 온 사람들처럼 뭔가 가치 있는 것을 찾으러 고전의 세계로 들어온다. 하지만 고전 속에는 오래전 사람들이 이야기한 형체를 알 수 없는 조각들만 즐비할 뿐 사람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없다. 어쩌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고 더 나아가 “찾지 말아야 한다” 가 타당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런 태도(뭔가를 찾으려는)의 근본적 잘못은 우리가 배워 온 교육에 있다. 정확하게 교육의 목적과 방법에 있다. 뭔가를 배우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생활에 적용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 모두의 뼈 속 깊이 새겨져 있다. 이른바 교육을 통해 성장과 효율성에 중점을 두었던 방법적 오류가 가져온 가장 큰 폐해일 수 있다. 처음 교육을 받을 때부터 사람들은 그렇게 훈련되어 왔기 때문에 이 방식에 대한 회의나 고민은 전혀 없다. 


고전을 배우는 가장 큰 목적은 고전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제일 우선한다. 그다음부터가 다르다. 내용은 내용으로 그냥 두자.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통용된 지식이며 방법이고 문제 해결 방법이다. 그러니 그냥 두는 것이 옳다. 자기 것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아니다. 오랜 세월 전의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순간, 고전은 자신의 방식으로 왜곡될 우려와 함께 고전에 있는 더욱 중요한 다른 것은 사라지거나 잊힐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이 자신의 방식으로 왜곡된다는 것은 무엇이 옳고 틀린 것인가의 이분법이 문제가 된다. 국가 주도 교육에서 언제나 옳다고 강요된 수많은 주의, 주장이 이미 우리 머리 속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여러 종류의 주의와 여러 종류의 금지와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일탈과 회피가 우리를 어지럽게 한다. 고전 역시 그러한 주의 주장의 보조 자료로 잠시 차용되었다가 이내 다른 생각이 그 자리를 채운다. 생각해보라! 그렇게 우리에게 사용되었다가 사라져 간 고전이 얼마나 많은지를.


나의 방법은 이러하다. 일단 우리가 배우는 고전을 객관화 하자. 그리고 고전을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또 함부로 나의 내부와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설사 비교해 보더라도 고전은 여전히 객관적 사실로만 존재하게 할 뿐, 나의 정신 속에서 그 어떤 기준에 맞게 고전을 적용하지 말고 철저하게 객관화된 상태를 유지하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우리가 배우는 고전은 그 자리에서 빛나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 빛나는 고전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고전의 향기, 혹은 인문학의 향기를 우리가 느끼기 위해서는 고전의 지식을 우리의 기준으로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을 철저하게 객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고전의 향기를 오래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장자 덕충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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