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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l 07. 2016

Le Bouquet de marguerites

사람과 자연

Le Bouquet de marguerites, 1871-74. Pastel, 70.3cmⅹ83cm

장자, 오르세를 걷다. 열 두 번째 이야기

Jean-Francois Millet(장 프랑소와 밀레)의  

Le Bouquet de marguerites(마가렛 꽃 다발) 1871-74


Gustave Courbet(구스타브 쿠르베)라는 걸출한 화가가 시도했던 사실주의라는 화풍은 당시의 아카데미즘 화풍에 반항하는 것을 핵심 이념으로 삼았다. 아카데미즘 화풍이란 전통과 권위를 중시하는 학풍으로서 정부에 의해 설립, 비호되고 전통에 의해 지지되는 예술적 유파를 말한다. 쿠르베는 이러한 아카데미즘을 거부하는 자신의 예술적 지향점을 위해 아카데미즘이 눈 돌리지 않으려 했던 “돌 깨는 작업”이나, “목욕하는 여인” 등 지극히 현실적인 그림을 사생(寫生)하였으며, 저 유명한 《오르낭의 매장(埋葬)》(1850)과 같은 작품으로 사실주의를 주장하였다.



쿠르베와 함께 그 사실주의의 정점에 선 또 다른 작가가 바로 이 그림을 그린 Jean-François Millet(밀레, 1814~1875)이다. 밀레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농촌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살 때 쉘부르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한 그는 1837년 파리로 유학해 역사화파의 Paul Delaroche(들라로슈)의 제자가 된다. 1849년 파리 교외의 퐁텐블로 숲 속 작은 마을, 바르비종으로 거처를 옮긴 밀레는 이후 농민의 고통과 노동의 신성함을 집중적으로 화폭에 옮겼다. 'Des Glaneuses(이삭 줍기, 1857)', ' L'Angélus(만종, 1857-1859)' 등의 걸작이 이 시기 작품이다.



햇빛 잘 드는 창문틀 위에 데이지 꽃으로 보이는 환한 꽃다발이 항아리 가득하다. 그 뒤에 한 소녀가 수줍은 듯 꽃이 만든 그늘에 숨어 있다. 아니 정확하게 소녀인지 아니면 아낙네인지 알 수 없으나 바느질을 하던 중에 꽃을 그리는 화가를 발견하고 뒤로 숨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위를 묶어 놓은 긴 끈 밑으로 보이는 창틀에 밀레의 사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밀레의 그림에서 보이는 인물의 정형성은 대부분 무표정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당시 프랑스 민중들의 삶이 그러했으므로 사실적 화풍의 밀레에게 그렇게 묘사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밀레가 본 바르비종 마을 주위의 사람들은 고통과 가난으로 찌든 일상을 유지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그 사실적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다 보니 밀레의 그림은 우울하거나 아니면 처량하고 혹은 지나치게 고요하다. 이 그림도 소녀의 수줍은 표정과 태도로 보아 외지인을 쉽게 보지 못한 농촌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그림 ‘이삭 줍는 사람들’에서 보이는 당시 민중들의 곤고함과 ‘만종’에서 보이는 음울함을 우리는 지난 중고 시절 애써 평화롭고 안정적인 이미지로 오해한 채 오늘에 이르렀음을 반성해야만 한다.    



데이지꽃 가득한 화분을 창틀에 내놓고 그 뒤에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외부를 보는 저 사람의 눈에서 당시 밀레가 그의 그림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의식, 즉 사실에 근거한 회화 정신과 민중의 삶에 대한 애정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장자 이야기

사람과 자연


知天之所爲(지천지소위) : 자연 이하는 일을 알고

知人之所爲者(지인지소위자) : 사람 이하는 일을 알면

至矣(지의) : 지극하다.(지극한 자람이다.)

知天之所爲者(지천지소위자) : 자연 이하는 일을 아는 자는

天而生也(천이생야) : 자연 그대로 살아가고

知人之所爲者(지인지소위자) : 사람 이하는 일을 아는 자는

以其知之所知(이기지지소지) : 자기 지식이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以養其知之所不知(이양기지지소부지) :그 지식이 알지 못하는 바를 키워 나간다.

終其天年而不中道夭者(종기천년이부중도요자): 그 천수를 다하고 도중에 일찍 죽지 않는 것은

是知之盛也(시지지성야) : 이것이야 말로 매우 훌륭한(지극한) 것이다.



인간의 지식은 완전하지 않다. 따라서 바른 지식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어디엔가 의거하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적인 것인지 혹은 인위적인 것인지 이를 분명하게 해줄 표준이 있어야 완전하지 못한 지식의 틈을 약간이라도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견해’에 언제나 사로 잡혀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생을 통해 익힌 이런저런 선입견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알고 산다. 이러한 인간을 무지와 착각과 오류에서 일깨울 기준, 혹은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사람을 진인이라 한다.



그러면 진인이란 무엇인가? 진인은 역경을 억지로 거역하지도 않았고 성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아무 일도 꾀하지 않는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진인의 지식이 세상을 초월하여 자연의 도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진인은 한편으로 자연(하늘)과 같은 입장이 되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과 같은 입장이 된다. 자연(하늘)과 사람이 서로 다투지 않고 조화되어 있기에 진인은 조화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그는 ‘이것이다 저것이다.’라는 분별이 없는 세계에 있다.


장자 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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