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와 슬픔, 그리고 말(言)
Gustave Courbet (구스타브 쿠르베 1819~1877)는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 가까운 시골 동네인 프랑슈콩테 주 오르낭에서 부농의 아들로 출생했다. 미술 교육은 그가 12세가 되는 1831년에 오르낭의 학교(Petit Séminaire)에서 받기 시작했다. 1837년부터 는 학교를 브장송(Besançon)의 고등학교(Collège Royal)로옮겨 그림 공부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파리에 법률학교를 보냈으나 파리로 간 쿠르베는 법률가가 아닌 화가가 된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가 필생을 두고 추구했던 예술적 가치는 사실성(Reality)이었다. 그가 그린 모든 작품은 실제로 존재하고, 우리 눈에 확연하게 보이며 동시에 어떤 인위적 조작도 없는 인물과 풍경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사실주의(Realism) 회화의 대표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의 대표작은 너무 많지만 그가 그린 이 오르낭의 매장(Un enterrement à Ornans 1849-1850)은 우리에게 사실(Reality)이 무엇인지 그림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의 고향 오르낭에서 죽은 그의 외조부를 묻는 광경을 그린 이 그림은 크기가 무려 가로 6m 68cm 이고세로는 3m 15cm 나 된다. 크기에 압도당한다.
그림의 등장인물이 많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성직자 집단과 그 옆으로 마을의 유력자들, 그리고 죽은 자의 친지들이 거의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는 매장을 위한 구덩이가 파져 있고 몇 명의 사람들이 그 주위에 둘러 서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는 이 그림은 전혀 특이할 것이 없는 그림이다.
하지만 그림을 자세히 보자. 먼저 사람들의 표정에서 죽음에 대한 슬픔이나 애도는 찾아볼 수 없다. 마치 만화 혹은 캐리커쳐의 주인공처럼 제 각각 다른 표정의 인물들이 장례식에 와 있을 뿐이다. 단지 고인과의 관계가 있는 몇 사람 만이 슬픔에 잠긴 듯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쿠르베 이전의 장례 묘사는 지극히 조작된 슬픔, 이를테면 엄숙하고 장중하며 질서 정연한 모습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이 그림에서는 주인공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평균적 크기로 묘사되어 있다. 쿠르베 이전의 회화에서는 모든 그림에 중심인물이 있고 그 인물을 중심으로 위계적 내러티브가 전개된다. 하지만 이 그림은 지극히 민주적(?)이라고 할 만큼 모든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프랑스혁명만큼 파격적인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가장 파격적인 것은 역시 기독교적 질서를 한 순간에 무너뜨린 것이다. 이 그림에서도 십자가는 등장한다. 쿠르베 이전의 대부분의 그림에서 십자가는 항상 그림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십자가가 등장하는 그림은 일반적으로 종적인 구도로 되어있다. 횡적인 구도라 하더라도 십자가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펼쳐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쿠르베는 이 형식을 단 번에 파기하고 만다.
이 그림에서 십자가는 그저 평이한 장식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니 이 그림에 대한 기독교인을 포함한 일반인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뿐만 아니라 사제들 중 의식을 집전하는 사제의 코가 빨간 것으로 미루어 그가 어쩌면 취해 있음을 보여주고 다른 사제들이 쓰고 있는 모자는 교회용 모자가 아니라 프랑스혁명으로 구성된 혁명정부의 관리들이 쓴 모자이다. 이것은 모두 쿠르베가 의도한 것으로서 사제들의 타락과 무질서, 그리고 당시 복잡한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기존의 질서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는데 그 도전은 매우 큰 모험이며 동시에 큰 위험을 수반하기도 한다. 쿠르베는 이 그림을 만국 박람회에 전시하려 했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질서에 대한 도전은 많은 장벽이 있다.
이 그림이 가지는 또 다른 큰 회화사적 의미는 쿠르베의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간에 렘브란트에 대한 오마쥬(hommage)라고 볼 수 있다.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렘브란트)가 1642년에 완성한 ‘야경꾼’(De Nachtwacht ; De compagnievan kapitein Frans Banning Cocq en luitenant Willem van Ruytenburgh maakt zichgereed om uit te marcheren)이라는 그림은 당시의 회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소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중 가장 특별한 것은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수평적 배치였다.
(Rembrandt 이전에도 역시 네덜란드의 Frans Hals와 Pieter Codde가그린 근위병들- De Magere Compagnie,1637도 수평적 배치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렘브란트는 그만의 빛으로 중심인물을 비추고 있지만 내용이나 형식의 측면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그림이었다. 물론 쿠르베가 렘브란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쿠르베 그림의 횡적인 배치가 그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이전의 그림으로부터의 영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50명이나 되지만 동일한 곳을 응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은 쿠르베가 자신의 나라에서 지난 세기의 혁명으로 조성된 민주적 시민의 본질이 다양성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그의 사실적 회화로 옮겨 놓았을 것이다. 이 쿠르베의 회화적 투쟁은 그 뒤 20세기 초의 예술적 경향이었던 모더니즘의 기초가 되었다.
그가 살았던 이 시기 프랑스는 1789년 대혁명 이후 국회가 나라를 다스리는 공화정과 나폴레옹이 다스리는 시기 등을 거친 이후 왕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왕은 귀족과 왕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고 부르주아들은 이에 반발하여 1830년 다시 7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1840년대에는 산업혁명이 진전되어 노동자들이 성장했고 이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2월 혁명을 일으켰다.
2월 혁명 이후로는 소시민층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입법권이나 행정권 같은 지식인의 문제보다 노동, 급료, 휴식을 다루는 민중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대중들은 농부와 소지주, 노동자와 장인으로 계층이 나뉘었고 노동계급이 혁명 세력으로 자신의 이익에 관심을 갖고 등장했다. 당연히 부르주아들은 이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보였고 쿠르베가 살롱에 오르낭의 매장을 출품하였을 때가 이와 같은 시기였다.
이러한 근대사회의 변화과정과 새로운 가치관 등을 쿠르베는 ‘오르낭의 매장’을 통해 구체화된 모습으로 나타낸 것이다.
‘양생주’에 등장하는 ‘노담’의 장례식 일화는 ‘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진일'이 노담의 장례식에 갔다. 사람들이 슬피 곡을 하는 것을 본 '진일'은 조문의 예도 다하지 않고 나와 버렸다.
이에 노담의 제자가 진일에게 왜 조문의 예를 다하지 않느냐고 따지자 진일은 이렇게 대답한다.
“저 노담이 사람을 모이게 한 데에는 반드시 위로하는 말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위로하는 말을 하게 하고, 곡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곡하게 하려 함이 있었을 것이다.”
진일은 평소에 노담을 훌륭한 사람이라 여겼는데 막상 그의 장례식에 와 보니 곡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진일의 생각은 이러했다.
“태어나는 때를 편안히 맞이하고, 죽는 때를 편안히 따르면 슬픔이나 즐거움 따위의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거늘, 저 사람들의 곡은 분명 노담이 은연중에 그런 감정을 드러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뜻이다.
이 문장은 죽은 노담의 잘못이라는 주석도 있고 또 죽은 노담보다는 보통사람들의 성향으로 볼 때 죽음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존재라는 주석도 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노담의 장례식에는 곡(哭)으로 죽음의 슬픔이 흘러넘치니 장자의 생각에 비추어 천리에 어긋나고 말았다.
장자 대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