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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l 10. 2016

La Blanchisseuse (세탁부) 1863

실존의 문제, 그리고 도(道)

La Blanchisseuse, 1863. Oil on wood, 49cmⅹ33.5cm

장자, 오르세를 걷다. 열네 번째 이야기


혁명, 그리고 민중의 고단한 삶

Honoré Daumier(오노레 도미에)의 La Blanchisseuse (세탁부) 1863


프랑스혁명은 정치적으로 위대한 사건이었으나 민중에게는 다만 권력의 중심이 바뀌는 정도의 사건이었을 뿐, 그들의 삶은 혁명 이전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민중들에게 돌아간 것은 여전히 무거운 세금과 가혹한 노동조건, 그리고 좀 더 조직화된 권력의 감시였고 그러한 분위기는 20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작가인 Honoré Daumier(오노레 도미에 1808~1879)다. 위대한 시인 Charles Baudelaire(샤를 보들레르)에 의하면 도미에는 “근대 미술의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사람”이라고 그를 격찬하였는데 이는 도미에가 근대 미술사에 남긴 영향을 웅변하고 있다. 사실주의를 넘어선 도미에의 인물 묘사는 윤곽의 묘사에 있어 굵고 강렬한 표현을 사용하여 보기에 따라서는 마치 미완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인물 묘사는 인상파 회화를 넘어 야수파 회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림의 주인공은 세탁부 여인과 여자 아이다. 여인은 한 손에는 무거운 빨랫감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자신의 딸로 추정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높은 계단을 오르고 있다. 누추한 옷과 구부러진 등에서 혁명 이후 여전한 민중의 지치고 힘든 일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계단을 오르는 여인과 딸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어둡고 무거워 보인다. 채도가 없는 옷의 표현과 거의 윤곽을 뭉갠 얼굴을 묘사한 도미에의 의도는 절망적 현실감, 그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뒤쪽 배경은 환하다. 아마도 아침나절 해 떠오르는 무렵 막 일터에 도착한 세탁부 모녀를 묘사한 듯하다. 어머니는 손을 마주 잡은 딸아이가 계단을 오르는 것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 도미에 그림에서 언제나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인간미가 예외 없이 이 장면에서 느껴진다. 아이가 계단을 잘 오르지 못해도 어머니는 전혀 채근하지 않는다. 약간 구부린 그녀의 자세와 느슨하게 잡은 그녀의 손으로 보아 아이가 제 힘으로 계단을 오를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주고 있는 모습이다.


도미에가 살았던 시기는 프랑스 최대의 정치적 격변기였다. 7월 혁명과 루이 필리프의 입헌 왕정, 그리고 보불전쟁의 참패와 이에 대한 격렬한 시민운동이었던 파리 코뮌, 이것을 파기하는 제3공화정이 연속되는 시기였다. 민중을 위한 정치적 변화는 없었고 오직 권력 투쟁뿐이었다. 그 암울했던 시기에 파리의 세탁부였던 어머니의 모습을 정치권력에, 민중을 어린아이에 빗대어 어머니가 아이에게 하고 있는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알레고리적 방법으로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2016년, 이 나라에서도 이 그림은 매우 유효해 보인다. 국민에게 그림의 어머니가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최소한의 여유와 인내로 국민을 대하는 이 땅의 권력을 도미에처럼 꿈꿔본다.



장자 이야기

실존의 문제, 그리고 도(道)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과 시류에 영합하는 문제도 생존이 보장된 이후의 문제이지, 생존 문제 자체와 우열을 다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20세기의 실존주의 그 원류가 어쩌면 장자의 사유로부터 출발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장자가 생존했던 당시는 전쟁 중이었고 언제 어디서든 징집되어 죽음의 전쟁 판에 내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찬가지로 서양의 실존주의도 세계 대전을 거치며 그 어떤 문제보다도 실존의 문제를 넘는 것은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장자는 새로운 주장을 편다. 바로 무용지용의 논리다. 즉, 쓸모의 잣대를 버리는 것이다. 인간 세상의 가장 큰 잣대가 유용성, 즉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일 것이다. 여기서 쓸모란 바로 위에서 말한 도(道)의 기준들인데 세상을 모두 이해하고 남음이 있을 정도의 진리나 그 진리를 깨닫는 것, 초월적 신비한 경지로의 끝없는 행진이다.(사실 거의 불가능하고 또는 처음부터 그런 경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장자는 양생주에서 소 잡는 포정을 등장시켜 이 도의 경지를 설명한다.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서 소를 잡는데 손으로 쇠뿔을 잡고, 어깨에 소를 기대게 하고, 발로 소를 밟고, 무릎을 세워 소를 누르면, 획획 하고 울리며 칼을 움직여 나가면 쐐 쐐 소리가 나는데 모두 음률에 맞지 않음이 없어서 상림의 무악에 부합되었으며, 경수의 박자에 꼭 맞았다.”

상상해보자. 일단 포정은 소의 뿔을 잡고 어깨에 얹은 다음 아랫부분은 발로 누르고 무릎을 세워 소를 지탱한다. 마치 소를 껴안아 한 몸이 된 듯한 형상일 것이다. 그 다음 19년 동안 한 번도 벼린 적이 없는 칼을 휘둘려 고기와 뼈를 해체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칼이 소와 만나서 내는 소리가 마치 전해 내려오는 최상의 음악을 연주하는 듯이 들린다. 부딪침이 연주가 되는 것이다. 포정은 스스로 자신이 기술에서 더 나아간 경지라고 말하는데 이를 테면 거기가 바로 도(道)의 경지일지도 모른다. 이어 포정은 처음 소를 보았을 때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시간이 지나 눈으로 소를 보지 않고, 소의 구조대로 슥슥 칼을 움직이니 하물며 복잡하게 얽힌 힘줄도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데 큰 뼈는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 해체의 절정은 늘 두렵다고 고백한다. 절정의 순간은 뼈와 힘줄이 엉겨 모여 있는 곳이 이르렀을 때다. 우선 지금까지의 속도를 늦추고 시선을 한 곳에 집중한다. 집중을 유지하면서 칼을 미세하게 움직여서 뼈와 힘줄 사이를 스르륵 움직이면 이와 동시에 고기는 해체되어 바닥에 떨어진다. 이제 포정과 소도 분리되었고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다가 이내 제정신이 돌아와 칼을 닦고 일을 마무리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사실은 포정의 집중이다. 포정은 이 집중의 순간에 “감각과 지각 능력의 활동을 멈추고” 신(神)의 작용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순간은 어떻게 도달할까? 포정은 처음에 소를 보았을 때는 소의 전체 모습만 보였다 했다. 3년이 지나자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했다. 그 3년을 포정은 어떻게 보냈을까? 직업이니 매일매일 소를 잡았을까? 아니면 하루 종일 소만 쳐다보기를 부지기 수로 보냈을까? 


쳐다보기와 소 잡기를 반복했다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살아있는 소의 움직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작용을 깨우치고 칼을 든 몸으로 해체하면서 보이지 않았던 곳의 구조를 확인하는 작업의 반복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시작은 감각과 지각을 최대한 동원하였으나 시간이 쌓여서 어느 순간, 그 모든 활동이 멈추어도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경지, 그것은 포정과 소가 하나가 되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소와 포정과 칼이 하나가 되었을 때 포정의 행위는 도(道)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장자 양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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