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의 쟁기질 그리고 말발굽
가로 260cm, 세로 134cm의 비교적 대작인 이 작품은 봄날 쟁기질을 하는 농부와 소의 모습을 생생한 느낌의 토양을 배경으로 하여 묘사한 매우 사실적인 작품이다. Rosa Bonheur(로자 보뇌르)로 불리는 이 화가의 정식 이름은 Marie-Rosalie Bonheur(마리 로자이유 보뇌르, 1822-1899)이다. 아버지가 직업적인 화가였으므로 어린 시절 보뇌르는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그녀는 동물의 묘사에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였는데 이것은 그녀의 다양한 노력의 결과였다. 이를테면 아직 남녀의 차별이 엄존했던 19세기 중엽, 동물을 도축하던 도축장은 여성 출입금지 지역이었다. 말을 비롯한 동물의 뼈와 근육의 실제 모습의 관찰이 절실했던 보뇌르는 경찰의허가를 받기위해 남장을 한 뒤 도축장에 들어가 말과 다른 동물의 뼈와 근육의 모양을 스케치하게 된다. 마치Leonardo da Vinci(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보뇌르는 세밀하게 동물의 근육과 뼈를 이해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유명한 “Le Marché auxchevaux(말 시장, 1853)”의 역동적인 말들이 그려지게 된 것이다.
이 그림 또한 소 근육의 움직임과 가죽의 세밀한 주름에서부터 소들의 다리 하나 하나가 모두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거기다가 쟁기가 지나간 자리의 흙덩이와 아직 일구지 못한 땅의 질감이 마치 우리가 현장에 서 있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사진의 선명함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확연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따라서 보뇌르의 그림은 사실주의의 범주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쿠르베의 사실주의보다는 이상적인 느낌이 강하고, 퐁텐블로숲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바르비종 파의 감상적인 그림에 비해서는 다분히 논리적인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보뇌르는 여성의 사회적 위상에 매우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19세기말의 페미니스트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New Woman” 이라는 말로 표현될 만큼여성에 대한 인식이 대단히 진보적이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녀는 그녀 스스로 동물해부학을 공부하기 위해 남장을 하고 도축장에 갈 정도로 자신의 성취에 열성을 다하는 여성이었고 이런 사실 때문에 그녀는 다가 올 20세기의 여성의 사회적 공헌과 지위향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녀가 태어난 Bordeaux(보르도)는 프랑스 남부의 비옥한 지역이다. 유명한 포도주의 생산지로서 포도 농업을 주로 하는 곳이다. 이른 봄날 한 해를 준비하는 농부들의 힘찬 쟁기질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이 그림은,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역동적인 소의 모습과 보르도 지방 특유의 흑갈색 토양의 생명력이 혼합되어 사실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강렬한 느낌을 주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더불어 1830년부터 시작된 Louis-Philippe(루이 필리페)의 "July Monarchy(7월 왕정)"의 혼란과는 상대적으로 격리된 프랑스 남부 농촌을 묘사함으로서 보뇌르는 의도적으로 복잡한 파리의 정치 상황으로부터 눈을 돌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말 발굽은 소나 돼지와는 달리 통 굽, 즉 갈라져 있지 않다. 말 발굽에는 보통 쇠로된 굽쇠를 덧붙여서 말이 이곳 저곳을 달려도 발굽을 상하지 않게 보호해 준다. 하지만 이 모두가 말에게는 불필요한 일이다. 인간이 필요해서 굽쇠를 붙인 것이지 말이 굽쇠가 필요할 리 만무하다.
뿐만 아니라 말에게 재갈(입 안에 넣는 쇠 막대기, 생각해 보라 말의 입장을!)을 물려 이리 저리 말을 조종하고 또 사람이 타기 편리하게 안장을 말 허리에 얹고 관리를 위해 털을 깎으며 심지어는 빨리 달리라고 채찍을 휘두르기까지 한다. 정말 말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은 거의 악마 같은 존재일 것이다.
장자는 말(馬)이야기를 통해 인위(人爲)야 말로 무용하고 동시에 모든 본성을 침해하는 심각한 위해 요소라고 이야기 한다. 옹기장이가 다루는 무생물인 흙도, 역시 목수가 다루는 무생물인 나무에 대하여도 장자는 그 무생물의 입장에서 옹기장수의 재주와 목수의 재주가 무용한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당시의 현실 정치를 이야기 하는데 언뜻 보기에는 백성을 내버려 두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백성의 본성을 침해하지 말라는 것이 장자의 본 뜻이다.
장자는 계속해서 백성의 입장에서 이야기한다.(사실 공, 맹은 모두 위정자의 입장에서 이야기 하고 생각하며, 어떨 때는 아주 고매한 위치에서 어리고 우매한 백성들을 타이르는 소리가 대부분이다.) 백성들에게 무위로서 정치하면, 즉 말에게 본성대로 살게 하고, 흙은 본성대로 두며, 나무 또한 본성을 침해하는 조잡하고 불편한 인간의 인위를 가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스스로 본성대로 돌아가 그 곳에서 자연과 사람은 근본적인 도와 함께 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따라서 장자는 음악도 예의도 결국 인위의 소산이어서 무위의 도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고, 성인(언제나 공, 맹)이 말하는 어짊, 의로움, 예의, 지혜 또한 항상 자연의 본성에 존재하는 지극함에 어긋나는 인위의 소산이라고 보았다.
지금 이 이야기를 읽으며 뭔가를 여기서 찾으려 할지도 모른다. 지금의 현실, 또는자신의 처지에 적용될 그 무엇을 아주 애타게 발견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벌써 적용할 단어나 특정 문구를 정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인위요, 무위의 도가 아님은 자명하다. 2300년 전 이야기에서 지금의 현실에 쓰일 이야기를 찾는다는 것은 마치 고고학자가 다 무너진 폐허에서 유물을 찾아내는 것처럼 어렵고 힘든 일이다.
가끔 찾아내는 보물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유적이나 폐허를 그대로 두어도 때로 좋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장자의 이야기에서 그 무엇도 의도적으로 발굴해 내려는 마음을 놓고 다만 조용히 장자의 이야기를 읽고, 그 이야기를 한 장자의 생각을 더듬어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것을 넘어 시비와 흑백을 가려 분석하고, 해체 조합하는 것은 장자가 가장 경계하는 심각한 인위이기 때문이다.
毁道德以爲仁義(훼도덕이위인의) : 도덕이 훼손되어 인의가 되었으니,
聖人之過也(성인지과야) (이것은) 성인의 허물이다.
屈折禮樂以匡天下之形(굴절예악이광천하지형) : 예악으로써 손발을 굽혀 천하 사람의 모양을 바꾸고
縣跂仁義以慰天下之心(현기인의이위천하지심) : 인의를 높이 내세워 천하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려 했다.
而民乃始踶跂好知(이민내시제기호지) : 그리고 백성들은 이것(인의와 예악)에 힘써서 지혜를 좋아했다.
爭歸於利(쟁귀어리) : (그러나 너무 지혜를 따지고 예악에 힘쓰니)서로 이익을 다투는 지경에 이르러,
不可止也(불가지야) : 그치게 할 수 없게 되었다.
此亦聖人過也(차역성인과야) : 이것 또한 성인의 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