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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l 14. 2016

L'Atelier du peintre 1854-55

혼돈의 시대를 살아낸  장자, 그리고 쿠르베

L’Atelier du peintre. 1884-55

장자, 오르세를 걷다. 열여섯 번째


그림을 통한 혁명적 사고의 표현,

L'Atelier du peintre(화가의 아틀리에) 1854-55


Jean Désiré Gustave Courbet(쿠르베, 1819~1877)의 리얼리즘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쿠르베 이전 미술에서 항상 잠재되어 있는 아카데미적 체계와 귀족 혹은 지배 엘리트의 취향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뿐만 아니라 혁명과 반혁명이 끝없이 반복되던 19세기 프랑스, 그 파란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쿠르베는 회화라는 장치를 통해 화가라는 직업적 가치를 넘어 순수하고 동시에 과격한 혁명가의 이미지를 표방하고 있다.


1854~5년 사이에 그린 이 그림의 제목은 L'Atelier du peintre(화가의 아틀리에)인데 그 부제가 더 길고 의미심장하다. 부제는 Allégorie Réelle déterminant une phase de sept années de ma vieartistique (et morale)인데 풀이해 보자면 “7년 동안 나 자신의 예술적 삶, 또는 도덕적 국면에 대한 실질적  은유(이중성)”로 풀이될  수 있다. 즉 이 그림은 그가 왕성한 활동을 한 7년 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예술적이고 도덕적인 자극과, 그 자극에 대한 반응과 감상을 한 화면에 중첩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마치 하나의 연대기처럼 보이는 그림이다.


이 그림에 대해 쿠르베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상은 나의 스튜디오로 와서 그려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즉 쿠르베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세계는 그가 그림으로 표현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쿠르베 본인은 가운데 앉아서 풍경화를 그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옆에 누드로 서 있는 여인은 쿠르베 이전의 아카데미적 전통을 상징하고 있다. 

그 오른쪽으로는 쿠르베의 정신적 기반이었던 다양한 친구들이 묘사되어 있다. 시인이었던 George Sand(죠르쥬 상드)와  Charles Baudelaire(샤를 보들레르) 혁명가였던 Pierre-Joseph Proudhon(프루동), 그리고 그림 수집가인 Alfred Bruyas(브뤼야스), 음악가 François Sabatier(사바티에)와 그의 부인인 Caroline Unger(엉거)등이 줄지어 있다.


왼편에는 과거에서부터 쿠르베가 그림을 그리던 당시까지 그의 그림의 소재가 되었던 보통 사람, 혹은 동물들이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개와 함께 있는 사람은 프랑스 제 2 공화정의 유일한 대통령이자 프랑스 제 2 제정의 황제인 나폴레옹 3세, 즉 Louis-Napoléon Bonaparte(루이 나폴레옹)인데 쿠르베는 나폴레옹을 마치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태도를 분명히 했다.


이 그림은 파리 만국 박람회로부터 출품을 거절당했는데 그 이유는 경건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아카데미적 태도와 낭만주의적 경향에서 볼 때 이 그림은 난해하고 동시에 불편한 그림이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위대한 낭만주의 화가 Eugène Delacroix(외젠 들라크루아)는이 그림을 보고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그림”이라고 이야기했다.

쿠르베 스스로 밝힌 바에 의하면 이 그림의 모티브는 스페인의 Diego Velázquez(벨라스케스)가 그린 Las Meninas(하녀들)이었다. 하녀들이란 작품은 거울을 통해 보는 화가와 그가 그리는 대상과의 이중적 의미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시사하고 있는데 바로 이런 점을 바탕에 깔고 여러 가지 시간적 경과에 다른 인물들을 화면에 중첩시키게 된다. 마치 투명한 종이와 같은 레이어들을 하나의 프레임 위에 중첩하여 놓이도록 설계함으로써 그림을 보는 관람자는 한 화면 안에서 화가의 요구대로 지난 7년의 이야기와 그 이상의 이야기를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쿠르베는 이러한 자신의 그림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정밀하고 동시에 통합하여 우리에게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장자 이야기

혼돈의 시대를 살아낸 장자, 그리고 쿠르베


장자는 전국시대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응시했다. 전국시대의 강성했던 나라를 7 웅이라 부르는데 동방의 제(齊), 남방의 초(楚), 서방의 진(秦), 북방의 연(燕), 그리고 중앙의 위(魏)·한(韓)·조(趙) 나라를 일컫는다. 그중 장자가 살았던 땅은 중앙의 위(魏)의 영토였는데 이를 몽(蒙)이라고 불렀고 본래 그 지역은 옛 송나라의 영토였다. 장자는 개인적으로는 바로 멸족당한 송나라 왕족 출신이었다. 전국시대는 왕위쟁탈을 둘러싼 하극상과 광란의 피비린내가 천지에 진동하던 시대였는데 장자가 살았던 위, 진, 초의 역사도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왕이 생길 만큼 혼돈의 시대였다. 


장자는 권력이 인간을 미치게 한다고 생각했다. 권력의 세계는 개인의 의지와 욕망을 초월한 그 자체의 메커니즘(냉혹한 정치제도) 속에서 인간을 희롱하고 미치게 만들어서 마침내 파멸에 이르게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장자는 권력세계의 광란과 미혹, 그 전율과 비정함을 예리하게 응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국시대는 생산수단의 진보, 상공업 발달, 교통로 개발 등으로 전쟁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재화 축적, 정치조직 정비, 군비 확충 등으로 국가와 왕의 권력은 비약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전쟁에의 징발, 무거운 세금, 고단한 부역, 엄한 형벌에 학대당하여 백성들의 생명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가볍게 취급되었다. 사는 것이 고통이고 슬픔일 수밖에 없는 현실. 백성에게는 기아와 고통, 공포와 저주뿐이었고, 고아와 과부, 부상자, 사망자 수가 늘어만 갔다. 신체 불구로 병역을 피하는 것이 행운이 되었고, 형벌로 불구가 되는 사람 또한 부지기수였다.

그 와중에 송나라는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으로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더욱 컸고, 인근의 강력한 나라로부터 송나라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능멸당했다. 왕들은 약자의 굴욕감과 억울함을 갖고 패자(覇者)를 향한 과욕을 드러냈고, 그럴수록 백성은 더욱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 시대를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장자는 이 험난한 시간을 살아내면서 삶을 위협하는 국가의 부도덕성과 권력의 비인간성, 그리고 모든 지배계급의 독선과 아집을 비판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생각했다.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국가와 사회라는 구조와 문화와 가치라는 것들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리하여 마침내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최선의 길인가? 하는 생각에 빠져 들게 된 것이다. 


장자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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